등록 : 2005.08.02 20:03
수정 : 2005.08.02 20:10
|
임범 문화생활부장
|
아침햇발
영상물에 대한 나이별 관람(또는 시청) 기준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우리 사회가 맺은 약속이다. 같은 성인의 볼 권리를 다른 성인이 막지 못하게 하되,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그들의 나이대에 걸맞게 규제를 하자는 것이다. 성인과 미성년자의 차별이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 사회가 약속한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장은 여기까지다. 최근 지상파 방송의 알몸 노출 사고는 이 약속을 깨뜨린 것이다. 청소년 시청 시간대에, 그것도 지상파에서 알몸이 온통 드러난 건 ‘볼 권리’나 ‘표현의 자유’로 옹호될 수가 없다.
그럼 약속이 깨진 걸 두고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은 법대로다. 출연자들은 형사입건돼 조사를 받고 있고, 방송사는 사과와 아울러 해당 프로그램 관계 직원들의 징계를 검토하고 있다. 방송사가 고의로 이런 장면을 내보냈다면 처벌 대상이지만 아무래도 고의로 보긴 어렵다. 중대한 과실이 있다면 시청자들이 방송사를 상대로 위자료 소송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실 여부를 두고도 논란이 많다. 방송위원회에서 과실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
10년 전만 같아도 당장 출연자가 구속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경찰은 불구속 입건해 조사하고 있다. 경찰보다 더 흥분하는 건 언론이다. 책임을 묻고 재발을 막는 데 앞에 열거한 조처들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앞의 조처들로 충분하냐, 부족하냐를 따질 때 제일 먼저 짚어야 할 건 이런 사고가 다시 일어날 구조적 원인이 있느냐다. 몇몇 신문들은 이번 사고를 가능케 한 구조적 원인으로 방송사의 ‘선정성 경쟁’을 꼽았다. 거기 더해 인디밴드 또는 홍대앞 클럽 문화가 성기 노출을 수시로 해오지 않았냐는 의심을 보탠다.(이런 기사는 대개 “클럽에선 흔한 일”이라는, 따옴표를 동반한 제목을 달고 말미에 ‘성기 노출까지는 없었다’는 클럽 관계자의 말을 붙여놓고 있다.)
여기에 쉽게 동의하기 힘든 건, 문제가 된 프로그램이 선정성 경쟁과는 거리가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제도권 밖에서 고전하는 인디밴드에게 방송 출연의 기회를 주겠다는 이 프로그램이, 선정성에서 자기 매력을 발산할 수 있을까. 아울러 이런 사고를 칠 기질이 인디밴드에게 있다고 여길 근거라도 있는가. 현재로서는 해프닝성 사고 이상으로 보기가 힘든데, 준엄하게 꾸짖는 언론은 미국의 재닛 잭슨 사건을 예로 들면서 방송사에 막중한 과징금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재닛 잭슨 사건은, 잭슨이 공연 도중 가슴을 드러낸 장면이 지상파를 탔고, 이로 인해 미국 방송위원회가 해당 방송사에 55만달러, 잭슨에게 50만달러의 과징금을 내도록 한 사건이다. 이번 사고 뒤 언론은 이 사건을 금과옥조처럼 인용하지만, 미국에서는 이 결정이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미국 수정헌법 1조에 위배된다는 반대 여론이 나오고, 또 해당 방송사가 법원에 항소해 아직 최종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다.
재발 방지를 위해 과징금 부과 등 좀더 센 벌칙을 만들자는 데 굳이 반대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게 아니다. 처벌을 각오하고 방송사에 나가 바지 내릴 사람이 몇이나 될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맺은 약속을 지킨다는 명분 아래, 재발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막자고 이런저런 규제를 강화해 표현의 자유 자체를 옥죄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건 본말의 전도이며 역사의 퇴보다. 벌써 이명박 서울시장이 구청별로 ‘퇴폐공연’ 점검에 나서라고 지시하고 음악인들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반발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시내티 박물관장이 사진작가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사진전이 음란하다고 막는 주 검찰총장에 맞서 대법원에서 승리하기까지의 실화를 다룬 영화 <더티 픽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표현의 자유는 특정 개인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을 수 있지만 전체에게는 가장 중요한 자유다.”
임범/문화생활부장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