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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4 20:45 수정 : 2005.08.04 20:48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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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올해는 광복 60주년, 을사늑약 100주년을 말하면서 정작 근대 한민족의 운명을 크게 바꿔놓고 민족수난의 첫 장이 된 태프트-카츠라밀약 100년이라는 치욕의 역사는 망각한다.

루스벨트 미국대통령은 1905년 7월 29일 측근인 육군성장관(국무성의 전신) 윌리엄 태프트가 일본에서 내각총리 대신겸 외상 카츠라 다로와 한반도 문제에 대해 중대한 밀약을 맺도록 했다. 밀약의 요지는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갖지 않으며 미국의 지배를 확인한다”는 것과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통령 재임 시절부터 한국에 대해 대단히 악의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다. “한국의 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고 자치하기에 전적으로 적합치 않으며 장래 자치하기에 적합하게 될 아무런 징조도 없다”는 인식이었다. 그는 밀약 이듬해 ‘동양 평화를 이룬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태프트-카츠라밀약은 조약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합의각서’의 형식이지만 실질적인 협정이었다. 이 밀약은 루스벨트의 승인을 받아 밀약 내용을 미국정부의 공식입장으로 확인하였다.

루스벨트는 철저한 친일ㆍ반한정책으로 한국의 운명을 일본에 넘기는데 기여했다. 필리핀을 차지하고 러시아세력의 남진정책을 일본의 힘으로 막겠다는 계산이었지만 밀약 당시 이미 러시아는 일본에 패배한 후였다.

루스벨트가 한국의 주권과 독립을 부정하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인정하게 된 배경은 근거 없는 편견도 크게 작용했다. ‘편견’에는 하버드대학 동창으로 친구인 주미 일본특사 가네코 겐타로의 구실이 컸다. 일본쪽 자료에는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해야 된다는 것을 미국 국민 특히 워싱턴 당국에 납득시켰다”고 전한다. ‘납득’과정에서 엄청난 로비가 이루어졌다.

대한제국과 미국은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일방이 제3국의 위협을 받을 때는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하도록 했다. 조약 상대국이 제국주의 침략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보호장치’ 였다.

대한제국은 이 조약후 미국에 최초의 철도부설권과 운산금광 체굴권 등 막대한 특혜를 주고 루스벨트에게 ‘거중조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한미수호통상조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일본에 한국국권을 넘기는 밀약을 체결했다.

얼마전 미국 예일대학 폴케네디 교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퇴거하는 대신 미국에 체첸사태의 묵인을 요청하는 ‘거래설’과 함께 중국과 미국이 대만과 북한문제의 밀약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미국은 한민족의 동의가 없는 한반도 문제에 대해 어떠한 형태의 국제거래도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더불어 한반도의 안정과 통일에 기여해야 한다. 그것이 한국분단의 단초가 된 일제의 한국지배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용서받는 길이다.

미국은 20세기초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이유로 한국을 희생물로 삼아 일본제국주의화에 기여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진주만 피폭이라는 배신의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중국을 견제하고자 일본의 신군국주의를 지원ㆍ방관하다가 또 어떤 재앙으로 돌아올 것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클링턴 전 미국대통령은 1세기전 하와이군도 합병과 주민희생에 대해 사과했다. 한국에 대해서도 사과하는 것이 미국이 추구하는 평화와 인권에 대한 신뢰성의 회복이 될 것이다.

김삼웅/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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