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8 18:49
수정 : 2005.08.0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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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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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이나 독점에 대한 논쟁은 표면적으로 경제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경제력 집중이 가져올 정치사회적 파급효과에 대한 우려가 감춰져 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은 예금보험의 대상이 되는 부문과 그렇지 않은 부문을 합쳐놓음으로써 도덕적 해이 문제를 가중시킬 뿐 아니라, 금융과 산업부문을 아우르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거대자본의 탄생을 돕는다. 독점도 단순히 경제효율을 저해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독점기업의 등장에 따른 경제력 집중이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반독점법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셔먼법 제정 당시부터 경쟁정책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엑스파일’ 사건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견제를 받지 않는 경제권력에 대한 이와 같은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닌 듯하다. ‘엑스파일’ 사건의 본질은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유력 대선후보에게 자금을 지원하도록 교사한 것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치인이나 임면권자의 통제를 받는 공무원과는 달리,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는 재벌총수가 민주선거에 부당한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한 것이다. 불법적인 통로를 통해 적발한 불법 행위에 대한 사법처리가 가능한지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다.
그런데도 ‘엑스파일’ 사건에 대한 보도는 과거 행해진 불법 도청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권력자의 대화를 엿듣는 것이 권력자에게 돈을 건네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보다 민주주의에 더 큰 해악을 끼친다는 식으로 말이다. 삼성에 대한 기사를 쓸 때 삼성의 돈과 힘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대다수 기자들의 체험담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경제권력에 대한 견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제도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이 있다. 제도적으로는 재벌총수가 남의 돈을 가지고 주인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금융기관에 맡긴 고객의 돈이나 일반주주의 돈을 재벌총수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쓰지 못하도록 ‘감시자 있는 경영’체제를 확립하고, 배임 등에 대해서는 엄정한 법집행이 이뤄지며, 고객이나 일반주주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사적구제 제도가 확충되어야 한다. 즉, 투자자의 돈이 재벌총수의 돈으로 둔갑하여 부당하게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도록 투자자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와 경쟁제한적 행위의 금지도 경제력 집중 문제를 해소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경제권력을 견제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본분이 무엇인지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공정하고 정확한 보도를 최고의 가치로 삼아야 할 신문사의 사장이 정치인에게 자금을 배달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다. 전직 판·검사와 관료, 기자가 재벌총수를 위해 법률자문을 하고 로비를 하며 홍보를 하는 것 역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부정하는 행위다. 경제권력에 대한 견제는 시민단체 몇몇의 노력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룬 민주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또다른 독재권력의 등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임원혁/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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