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8 21:02
수정 : 2005.08.08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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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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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칼럼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를 통해 드러난 삼성의 위력은 막강하고 전방위적이다. 97년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그렇다. 과연 ‘삼성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삼성공화국의 정점에 이건희 회장이 있다. 한 기사에 의하면 “‘안기부 엑스파일’에 나타난 이건희 회장의 모습은 정치권력-경제권력-언론권력-검찰권력 등 이른바 ‘4각동맹’의 구성원 가운데 가장 힘있는 맹주”다. 그럼에도 권리의 영역에서만 절대군주일 뿐 책임의 영역에서 이건희 회장은 안개 속의 흐릿한 실체로만 존재한다. 그게 문제다. 삼성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초일류 기업이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로 꼽혔다는 이건희 회장 개인의 문제에 이르면 삼성의 초일류 정신은 눈녹듯 사라진다. 침범할 수 없고 문제삼을 수 없다는 ‘성역’의 의미를 재연 프로그램처럼 반복적으로 보여줄 따름이다. 성역을 지키는 최대의 무기는 원천봉쇄주의와 일사불란함이다. 삼성에서는 깔끔한 일처리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제3자가 보기엔 요즘 방영 중인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부조리하다. 사업가인 엄마가 영화배우 딸의 스캔들이 인터넷에 올라오자 직원에게 ‘무조건 막아, 어떻게 해서든 막아’라고 단호하게 지시한다. 자기 기준만 앞세워 해결책을 지시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한술 더 떠 집에 와서는 딸의 방에 있는 컴퓨터를 치우게 한다. 코미디다. 피시방이 천지인 세상에서. 나름으로는 다 원천봉쇄라고 하는 짓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무노조 경영이나 경영권2세 승계 문제에 대한 삼성의 반응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내 화장실에서 ‘노동자의 권익’과 관련한 낙서가 발견되자 삼성은 전사원 필적조회를 통해 결국 낙서의 ‘범인’을 잡았단다. 삼성내부에서 금기시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출간되면 전량 수거해 버린다는 주장도 있다. 무노조 경영이나 경영권 승계 모두 오너의 의중임이 백퍼센트 확실한 사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너를 중심으로 한 삼성의 원천봉쇄주의는 단지 기업 내부문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한민국 기업을 ‘삼성과 기타’로 나눌 수 있을만큼 절대영향력을 가진 삼성은 <파이낸셜 타임스>의 사설처럼 ‘시장을 넘어 정부정책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때때로 정책을 지시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개정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 등 그런 사례는 적지 않다. 군대에서 고참팀과 졸병팀이 축구시합을 할 때 규칙이 한가지로 통일되는 경우가 있단다. 규칙의 대전제는 고참이 이길 때까지이다. 근래에 삼성은 많은 분야에서 군대 고참팀처럼 게임의 룰을 삼성에 유리하도록 바꾸려 한다는 강한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 3월 한 재벌 회장은 이건희 회장의 주택 신축과 관련하여 조망권 등의 문제로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그에 따르면 이 회장측의 공사는 종전 건물과 ’다른 기준점‘을 잡았단다. 그 지역은 경관지구로 돼 있어 건물높이가 8미터를 초과할 수 없는데 이 회장측에선 지표면을 해발기준으로 잡아 3.7미터 더 높은 건물을 세우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이회장은 그 재벌가의 집을 사들이는 것으로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했다. ‘종전과는 다른 기준점’이 보편적 상식과 충돌할 때 한계가 온다. 세상에는 ‘무조건 막아, 어떻게해서든 막아’가 통용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걸 삼성은 알아야한다. 다른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알아서는 절대로 안 될 ‘회장님’의 은밀한 지시사항들이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세상에 절대적인 원천봉쇄, 발본색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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