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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9 18:21 수정 : 2005.08.09 18:23

이봉수 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경제전망대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언론 보도 또한 그렇다. 경제 관련 보도를 이십년 가까이 꼼꼼히 정리해 오면서 놀란 것은 보도 패턴의 반복성이다. 재벌의 뇌물과 분식회계 사건이 끊임없이 재발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때마다 ‘대가 없는 뇌물론’ ‘피해자론’ ‘음모론’이 언론에 등장하는 것도 비슷하다. 비서실장이 소환돼 ‘회장과 무관한 일’이라 잡아떼면, 검찰이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 전형이다. 이쯤에서 총수들이 소환될 기미가 보이면 ‘경제 살리기론’이 등장한다. 지난해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연세대 정갑영 교수가 ‘이 불황에 경영인 구속해야 하나’라는 시론(<조선일보> 2004, 2, 27)을 기고한 것은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이니 거명된 정 교수는 재수없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비서실장 등은 설령 구속되더라도 얼마 안 가 ‘경제 살리기’를 위한 ‘경제인 사면론’이 나오고 뇌물을 받은 정치인들과 함께 석방된다. 1992년 정주영 후보 대선자금에 관여했던 이병규 비서실장(현 문화일보 사장)과 2002년 삼성 대선자금 책임을 뒤집어썼던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출감 후 승승장구한 것은, 능력도 있지만 총수들의 신임이 무한정 실렸기 때문이다. 빗대기 미안해도, 조폭 세계에서 두목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부하가 ‘별’을 늘려 2인자 자리를 확보해가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이학수 부회장이 출감 석달 만에 또 소환됐지만 종전 경로를 이탈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치권 검찰 언론 학계마저 삼성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도청 테이프에는 대통령후보가 ‘자본의 통치자’에게 돈을 타내려고 아부발언을 하는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산업정책에 대한 고민도 없이 기아차 인수를 ‘약속’하는 등 당선되기도 전에 발목 잡히는 광경이 선하다 못해 섬찟하다.

노 대통령이 이 부회장 소환에 앞서 "도청이 정·경·언 유착보다 본질적 문제이고 국가권력에 의해 국민에게 가해지는 범죄행위여서 더욱 심각하다"며 검찰에 가이드라인을 주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마저 삼성에 의해 ‘관리’돼온 사람이 아니길 바라지만, 적어도 그의 인식은 사건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도청이 권력층을 주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정·경·언 유착이야말로 폐해가 전국민에 미치는 사안이다. 만일 수사 결과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요인이었던 기아차 부도와 관련한 삼성 책임론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나라를 거덜 낸 사건으로 단죄돼야 마땅하다. 강경식 부총리에 대해 이 부회장이 "그 사람을 밀었다"거나 "3~5개를 주라"고 말한 대목은, 강 부총리가 채권단까지 살리려던 기아를 왜 그토록 옥죄었는지, 짐작케 한다. <중앙일보>가 '경제난국 속 사면초가 처지의 강경식 부총리'(김정수 전문위원 인터뷰: 1997, 10, 20) 기사 등을 통해 강 부총리 구하기에 열중한 이유가 설핏 드러난다.

홍석현 회장 발언은 정경유착을 떼놓아야 할 언론이 접착제 구실을 했음을 입증한다. 경제권력과 결합된 언론권력은 민주주의 제도들을 한갖 장식물로 격하시킬 수 있다. <중앙일보>와 홍 회장에게는 진보적 언론단체인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까지 호의적 태도를 보였고,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 김동민 대표는 ‘계몽군주론’을 펴기도 했다. 언론운동을 폄하는 게 아니다. 재벌과 재벌언론의 담론활동이 어디까지 효과를 미치고, 자본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이 얼마나 순진한지를 말해주는 우화이다. 이번에도 삼성과 <중앙>, 나아가 우리 사회의 지배구조를 민주적인 것으로 돌려놓지 못하고, 삼성 내부와 정치권 검찰 언론에서 삼성의 난국돌파에 기여한 ‘정난공신’을 양산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통치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이봉수/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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