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0 20:24
수정 : 2005.08.12 06:46
유레카
“서양 문명인의 눈으로 본다면, 중국과 조선을 보는 시선으로 우리 일본을 평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우리는 아시아 국가들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운명을 서구의 문명국가와 함께하는 것이 낫다. … 나쁜 친구를 소중히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들의 나쁜 평판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리는 아예 우리 마음으로부터 아시아에 있는 우리의 나쁜 친구들을 지워버리자.”
일본 메이지 유신기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毆) 얘기의 한 토막이다. 역사왜곡 교과서며, 야스쿠니신사 참배 문제로 한국·중국과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의 속내를 더없이 명쾌하게 보여준다. 탈아입구론이 단지 120년 전 얘기가 아니라 오늘에 막강하게 살아 있음은 제일 고액권인 1만엔 지폐에 후쿠자와의 얼굴이 자리잡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대체 누가 누굴보고 ’나쁜 친구’라는 건지?
1858년 미국의 요구로 개항한 뒤 100년이 채 안 돼 열강의 일원이 되어 미국과 전쟁을 감행한 것도 놀랍지만, 1945년 미국한테서 초토화된 지 50년이 채 안 돼 세계 2위의 경제대국, 미국의 제2 동맹국이 된 일본의 순발력은 입이 벌어질 만하다. 그 동력이 탈아입구, 아니 탈아입미(脫亞入米, 유럽을 버리고 미국으로 기운) 에서 나왔다면, 그에 대한 일본 국수주의자들의 집착을 이해할 만도 하다. 집권 자민당의 정책연구위 의장 규마 후미오는 2003년 2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일본의 견해를 묻는 말에 “나는 일본에 선택권이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한 주와도 같다”고 스스럼없이 대답했다던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중의원 해산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취임 이후 이웃 나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오로지 미국의 손에 매달려 일본의 군사·외교 대국화에 매진해온 그다. 일본이라는 ‘나쁜 친구’를 옆에 둔 동아시아 이웃들의 고민이 깊어간다.
지영선 논설위원
ys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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