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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0 20:25 수정 : 2005.08.10 20:26

김효순 편집인

김효순칼럼

2차대전 종전 60돌이 됐어도 아직 의문투성이로 남아 있는 것의 하나가 일제의 731부대다. 이 부대가 행한 세균전이나 생체실험은 인류 역사상 잔혹성·비인도성으로 따지면 최악의 전범 행위에 들어갈텐데 단죄의 길이 봉쇄됐고, 일본 정부가 공식자료가 없어 진상을 모르겠다며 여전히 얼버무리는 것도 기가 막힐 일이다.

일제가 1930년대 중국 하얼빈 인근의 핑방(평방진)에 세운 731부대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하나 추가됐다. <아사히신문>은 지난주 이 부대의 장이었던 이시이 시로 중장의 자필 메모가 담긴 노트 두 권이 그의 측근 집에서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메모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패전 직후 731부대의 도피 과정을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시이가 일본으로 도망쳐 신분을 감춘 채 미군 장교들과 접촉하는 상황을 담았다. 그의 메모를 보면 1945년 8월9일 옛 소련군이 대일참전을 선언하며 관동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하자, 도쿄에서 사령관이 날아와 모든 증거물을 폐기하고 철저히 보안을 지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간략히 기술돼 있는 메모에서 나의 관심을 자극한 부분은 그의 도피 일시와 경로다. 항복선언 다음날인 8월16일 창춘역의 귀빈실에서 밤을 새운 뒤 기차편으로 부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부산에서 화물선을 수배해 세균전 관련 자료를 잔뜩 싣고 그달 하순에 도쿄에 도착해 당시 육군성 의무국을 방문한 것으로 기재됐다. 한국·중국·러시아인 포로들을 대상으로 몸 안에 탄저균, 페스트균 등을 주입해 장기 변화를 측정하는 등의 천인공로할 인체실험을 한 책임자가 갑작스런 종전에 따른 혼란기라고 해도 한반도를 관통해 유유히 빠져나간 것이다. 우리의 태세가 갖춰지지 못해 희대의 전범 살인마를 심판하지 못한 것이 통탄스럽다.

이시이는 일본에 돌아와 부대원들을 해산시킨 뒤 관련자료를 비밀장소에 숨겼다. 그와 부하들이 미군 정보기관에 자료를 통째 넘겨주는 대가로 도쿄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은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세균전 관련자들이 모두 심판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옛 소련은 1949년 말 하바로프스크에서 연 별도의 군사재판에서 관동군의 마지막 사령관인 야마다 오토조 대장을 비롯해 군의부장 수의부장 등 12명을 세균전 준비, 생체실험 혐의 등으로 기소해 최고 강제노동 25년의 형을 선고했다. 소련은 이시이 등에 대한 직접 신문을 미국에 요구하나,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거절했다.

731부대 핵심간부들에 대한 단죄는 생체실험의 결과물인 자료를 입수하는 데 혈안이 된 미군 정보기관의 음모로 영영 무산됐다.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졸업한 뒤 군의학교 교관을 거쳐 세균전 부대 창설을 주도한 이시이는 패전 후 육군이 쓰던 건물을 이용해 여관업을 하다가 59년 후두암으로 숨졌다.

종전 60년을 맞는 시점에서 몸서리쳐지는 과거사를 화두로 삼는 것 자체가 짜증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일본의 용인할 수 없는 이중적 태도의 탓이 무엇보다도 크다. 일본 정부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6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치면서도, 731부대의 만행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이런 괴리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중국이 추진 중인 부대 터의 세계문화 유산 등록이 아주 실효가 있을 것 같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이미 올라있으니 세계의 여론을 환기시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김효순 편집인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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