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1 19:54
수정 : 2005.08.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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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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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도청 건에 대해 한마디 쓸까 봐요, 했더니 아침마다 업무상 얼굴을 대하는 전직 국회의원께서 염려한다. 그거 무슨 말을 해도 욕먹을 일을 왜 허우? 하고. 그이도 임기 중에는 휴대전화 3개를 사용했었다는 말을 흘린다. 아니, 국가기관이 불법 도청질을 하다니! 하고 놀란다면 그야말로 쌩뚱 맞은 반응이다. 아니, 재벌이 대선후보에게 100억원씩이나 갖다 바치다니! 하고 또 놀란다면 어쩌면 쌩뚱을 지나 이 땅에서 살아온 한국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전혀 모르지 않는 일, 오히려 익숙해서 멀미가 날 지경인 사안에 대해 새삼 놀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불법적인 방법으로 취득한 불법행위에 관한 정보다. 확 까면 속 시원해질까. 하긴 특별법이건 특검이건 불같은 여론을 배경으로 그 요물스러운 도청테이프의 내용은 세상에 공개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 흐름 앞에서 다른 의견은 입도 뻥긋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만 말이다. 소위 세상을 뒤집어놓을 핵폭탄이라고 너스레를 떨어대는 그 엑스파일 안에 그렇게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을까. 정말 궁금한 건가. 나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아니 궁금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정확한 심경이다.
대통령과 여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건만 흥미롭게도 그렇게 떨어져 나간 표가 한나라당의 지지율을 높여주지는 않는다. 정-관-재-언의 유착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카르텔에 대한 입장 때문일 것이다. 1987년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를 집권시켰던 30%대의 기득권 옹호 세력은 현재의 한나라당에게까지 이어진 변치 않는 상수다.
그 기득권 질서에 백기투항한 와이에스(YS), 부분적인 연대와 타협으로 세확장을 도모한 디제이(DJ)정권까지는 권력 지형도에 일정한 맥락이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도대체 어느 별에서 떨어진 외계인들인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 이어졌다. 현 정권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격렬한 반대는 이렇듯 재래의 기득권층과 이익과 정서를 공유하지 않는데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최근 삼성의 초소형 휴대전화가 영국 전문지에서 ‘이 달의 최고 휴대전화’로 선정됐다는 기사를 읽었다. 대부분의 취업 희망자들이 삼성이나 그와 유사한 대기업 입사를 희망하고 선망한다. 반면 도청 녹취록에서도 적나라하게 보여지듯이 재벌이란 거악의 원흉이자 타도의 대상쯤으로 여기는 ‘정의의 목소리’도 거세다.
<중앙일보> 또는 남은 테이프에서 등장할 가능성이 높은 언론사 쪽에서 도청내용을 덮자고 나오는 것은 볼썽사나운 일이다. 촌지를 받은 검찰, 집중적인 수혜대상인 한나라당도 차라리 입을 닫는 게 좋다. 국가범죄와 재벌정치의 폐해가 뒤섞여 있는 이 사안은 종래의 기득권 카르텔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노대통령 쪽이 해법을 찾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그것은 불법취득한 정보를 토대로 엄정한 단죄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고 정상적인 국가질서와 지배윤리를 찾아가는 데 있다. 다시는 국가기관이 집권자의 통치편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 도청행위에 대한 강력한 처벌이 선결과제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도청내용은? 국정원 전직 관계자가 이미 밝혔다. 온갖 치사하고 더러운 아첨, 모략, 금전거래, 여자문제가 다 들어있다고.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수도 있겠지만 또한 가장 더럽고 치사한 것이 뒷골목 인간사에 숨겨져 있다. 정치 선진화를 후퇴시키는 명백한 범법행위까지 묵인할 도리는 없겠지만 사적윤리에 해당되는 사실까지 까발려져 범국민적 관음증이 벌어지는 것만은 자제되어야 한다.
김갑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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