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6 19:07
수정 : 2005.08.1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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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식 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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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북쪽의 정병연 할아버지는 고려대 법대 재학 중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가족과 ‘생이별’ 했습니다. 남쪽의 김매녀 할머니는 두 딸을 신의주에 남겨둔 채 ‘월남’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보도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미묘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남한을 선택한 행위는 쉽게 월남이라 정의하고, 북한을 선택한 행위는 모호하게 헤어졌다거나 생이별했다고 표현하지요. 생이별을 뜻하는 과거의 공식 용어는 ‘행방불명’이었습니다. 이념과 자발성을 내포하는 ‘월북’은 누구에게나 그만큼 조심스러운 단어였던 겁니다. 하긴 월남이든 월북이든 그 자발성 정도에 대해서야 전란통의 당사자인들 명확히 알았겠습니까.
월북이란 단어는 피하면서도, 남쪽이 월북자 가족을 늘 따로 대접해 준 것도 재미있지요. 문민정부 시절 군복무를 끝내고 검사 임용 면접을 할 때의 일입니다. 법무부 차관께서 “큰외삼촌을 아느냐?”는 으스스한 질문을 던져주셨습니다. 물론 저는 큰외삼촌을 만난 적이 없었지요. 평택 출신으로 서울 공대 재학 중이던 큰외삼촌도 한국전쟁 때 가족과 ‘생이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책상 너머로 보이는 안기부 쪽 서류의 빨간 밑줄들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날 저는 아는 대로 외삼촌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의용군에 ‘끌려가’ 포로가 되었으며 거제도에서 북쪽을 택했다는 것, 이후의 소식은 모른다는 수준이었지요. 월북 지식인들이 대남 공작 인력으로 활용된다는 첩보 덕분에, 60년대 우리 쪽 기관원들이 심심찮게 외가를 드나들었다는 이야기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같은 조로 면접을 한 동기들은 면접장을 나서며 “외삼촌이 거물이셨나 봐요” 라고 어색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연좌제는 폐지되었어도, 해외유학이나 공직 임용이 걸려있을 때면 어느 구석에선가 불쑥 튀어나와 우리 가족을 고민케 하던 유령 같은 이름이 바로 ‘김세기’였습니다. 생이별이든, 행방불명이든, 월북이든 그는 지난 52년간 그렇게 우리와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물론 우리 가족은 그에 대해 빨간 밑줄 그어진 최소한의 정보조차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행방불명’ 이전과 이후에 무엇을 했는지, 심지어 생사조차도 모릅니다. 사범학교를 다니던 꿈 많은 소녀에게 오빠는 그저 함께 문학을 이야기하던 재기발랄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을 뿐인데, 어느덧 일흔이 훌쩍 넘어 이산가족 상봉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경은 착잡하기만 합니다. 월북자 가족도 이산가족 신청은 할 수 있는지, 혹시 오빠나 그 가족에게 불이익이 가는 것은 아닌지,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우리는 정말 괜찮은 것인지 하는 여러 고민 때문이지요. 저쪽에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자신 있게 가족을 찾아가는 월남자들이 오히려 부럽습니다.
황혼을 맞이한 어머니 세대에게 ‘생이별’과 ‘월북’을 구별해줄 이념과 자발성 따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천륜을 막는 국가의 범죄행위를 더 늦기 전에 중단해야 한다는 당위입니다. 감질 나는 ‘이벤트’식 상봉은 할 만큼 했습니다. 이벤트가 더 필요한 남북 당국자들이 있다면 차라리 <간 큰 가족> 비디오나 함께 빌려보기를 권합니다. 가짜 통일 앞에 만세 부르는 김 노인(신구)을 보고나면 느끼는 게 있겠지요.
그 세대가 가고 나면, 상봉의 눈물도 사라지게 됩니다. 상봉의 눈물 없는 통일의 기쁨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반세기 만에 겨우 몇 시간을 확보한 가족들에게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짓도 그만 하고, 상설면회소에서는 조용하지만 전면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합시다.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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