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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18 19:35 수정 : 2005.08.18 19:41

박예랑 방송작가

세상읽기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나오는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뻐야 돼, 뭐든지...!”이런 대사를 표정없이 섬뜩하게 말 그대로 예쁜 이영애가 내뱉을 때는, 그 말에 서린 핏빛 복수가 묘하게 포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만일 그렇게까지 잔인한 복수영화에 못생긴 여배우가 출연을 했다면, 과연 이런 흥행이 되었을까?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삶의 아이러니를 표현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에 의한 정말 참한 여배우의 변신이 기획 아이템이였을 뿐이다. 결코 며칠 전 마광수 교수의 논리에 의한 예쁜 여주인공만 성공한다는 공식과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논란이 되었던 방송을 미처 보지 못했었기 때문에, 신문으로만 기사를 접했던 나는 어떻든 방송을 보고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정말 마 교수가 지상파 방송에서 했단 말인가?”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내 기억으로 윤동주 시인을 연구하며 학자로서 누구보다 바른 길을 걸어왔었다고 생각했던 마 교수가 어쩌다 이런 궤변론자가 되었을까 안타까웠다. 방송을 본 뒤 결론을 종합해 보자면 마 교수는 너무 친절하게도 왜 많은 여자들이 나는 예쁘지도 않고 공부도 못하는지에 항상 스스로들이 고민하며 가졌던 의문에 대한 정답을 내려준 것이다. ‘게으르기 때문인 것이었다!’

이 얼마나 명쾌한 대답이란 말인가? 이제까지 그런 고민에 빠졌던 여자들은 게을렀다. 그래서 예쁘지도 않고, 공부도 못했으며, 남자들이 한눈에 반하지도 않았었다. 마 교수의 논리에 의하면 그저 모든 것이 게으른 여자들의 탓이며, 못생긴 여자들은 발을 붙일 곳은 없었다.

그것이 현실이며 본능이고 솔직함이라며 그 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쩌다’로 우겨버리는 모습에서 마 교수의 논리를 떠나서 그분이 토론이라는 상황에 대한 기본 인식마저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니, 어쩌다 학생을 교단에서 가르치는 학자가 상대와 의견을 교환하는 토론의 기본방식마저 무시하게 되었을까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마 교수의 논리가 아닐지라도 본능과 솔직함은 인간의 중요한 부분이다. 오히려 사회의 미덕이 된 지 오래이다. 이제 누구도 인간이 가지는 본능에 대해서 감추고 숨기거나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놀라울 정도의 솔직함으로 무장한 연예인들이 인기를 끌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그것이 구분 없는 방종과 외모지상주의나 부추기는 궤변으로 빠질 때, 우리는 냉정하게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다. 예쁜게 더 좋다라는 누구나 들어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수긍할 수 있는 이야기와 예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흑백논리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마 교수의 가장 큰 논리적 오류는 예쁘다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예쁘다’는 기준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다. 아무리 예쁜 연예인이라도 내 취향이 아니라서 예뻐 보이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나에게 ‘예쁘다’라는 논리로 풀어가려는 이야기는 절대 먹히지 않게 되어 있다.

더구나, 그 기준도 없는 모호한 ‘예쁘다’라는 단어에 그렇지 않으면 ‘게으르다’라는 비약까지 갖다 붙여 여성의 인격까지 호도하는 궤변은 어느 순간 자가당착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자식들과 남편 뒷바라지에 하루종일 방바닥에 앉을 시간 한번 없이 허둥지둥 거리셨던 우리 어머님들이, 그래서 자신의 머리 한번 매만지지 못했던 그 많은 어머님들이 마 교수의 눈에는 예쁘지도 않고 게을러만 보였단 말인가?

주름진 지금의 어머님이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이지는 않는지...그리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기준의 의견이지만, 그렇게 친절하게도 예쁘지도 않고 공부도 못하는 이유에 대해 정답을 알려주시고, 그런 게으른 여자들을 일깨워주시려 하는 마 교수님부터 조금은 더 부지런해지셔야 하지는 않을까?

박예랑/드라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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