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1 18:59
수정 : 2005.08.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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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자 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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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제 2의 광복’을 다짐하는 목소리와 그 메아리가 귓전을 두드린다. 60년 전의 광복은 진정한 의미의 자주 독립이 아니었기에, 또한 그 광복의 역사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업을 떨쳐버리지 못하였기에, 새로운 광복이 한민족의 숙제로 남겨져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한민족의 자주 독립’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왜, 얼마나, 희구하고 있는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제 2의 광복’을 말하려면 민족을 국가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 분단은 한반도에 적대적인 두개의 국가를 탄생시켰고, 이 국가들의 존립은 태생적 한계 때문에 분단의 유지와 그 정치역학 속에서 가능한 것이기에 민족통일의 과제를 국가적 이해관계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이 두 국가는 세계적 냉전체제의 대리전을 치루면서 이를 빌미삼아 국가권력을 반민주적으로 강화해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와중에서 ‘통일’은 국가적 전술의 도구가 되거나 국민동원의 슬로건이 되기도 했으며, 통일론 자체가 국가권력과 그 지배엘리트들의 독점메뉴로서 이들의 정치적 산술에 의해 요리되어 왔다. 이를 민족의 이름으로 포장하기 위해 아주 잔인할 정도로 인색한 이산가족 상봉이나 민간교류가 국가의 특혜 선물로 주어졌을 뿐이다.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통일이라면 이는 국가권력간의 협상과 정권차원의 정략을 떠나서 민족적 차원의 통일마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국가주도적 통일론이 아니라 국민들 스스로가 분단종식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도록 국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민족통일마당’을 구축하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함을 말한다.
‘제 2의 광복’을 말하려면 또한 오늘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시대에서 한반도의 분단종식이 어떠한 정치경제학적 지형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확실하게 짚어야만 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서유럽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결코 자본주의의 승리로 빚어진 결과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세계자본주의 질서로 단일화되는 글로벌 시대의 서곡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제 한반도의 분단 종식도 북한에 대한 남한의 경제적 우위성을 발판으로 한반도를 그 세계질서속으로 완전 통합시키는 작업의 하나라고 한다면, 이것이 과연 ‘제 2의 광복’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물어야 한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남한의 현실이 북한에까지 확산되고 한반도 전체를 세계자본주의의 보다 적나라한 각축전이 펼쳐지는 전쟁터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제 2의 광복’인가 하는 물음이다.
한편 천문학적 숫자의 ‘통일비용’을 조달하려면 남한의 국가경쟁력을 더 한층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면 ‘제 2의 광복’이 과거의 새마을운동이나 제 2 건국 운동과도 같이 국민동원을 위한 슬로건으로 변질될 소지마저 있다. 여기서 통일비용마련은 지난 60년간 준전시상태에서 ‘피난민 의식’과 ‘부평초 인생’에 시달리면서도 ‘배고픔의 한’을 ‘아시아의 용’으로 역전시킨 남한의 저력을 되살려내기 위한 확실한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기획은 현재 남한이 처한 경제적 침체와 이로 인한 사기저하를 반전시킬 수 있고 통일된 한반도가 ‘동북아시대’를 열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꿈이 ‘제 1의 광복’의 역사를 점철했던 개발독재국가 모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면, ‘제 2의 광복’은 두 분단국가의 태생적 한계와 역사적 경험을 뛰어넘는 새로운 국가공동체와 새로운 사회발전 패러다임을 꿈꾸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영자/가톨릭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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