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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21 19:34 수정 : 2005.08.21 19:35

임범 문화생활부장

아침햇발

1989년 초에 기자생활을 시작한 나는 97년 초까지 만 8년 동안 꼬박 6년을 사회부 법조기자로 지냈다. 그 6년 동안 검찰청사에서 자정을 맞은 밤이 얼마던가. 그 사이 마신 폭탄주를 게워내 술병에 담고 술집을 새로 차려서 팔아도 몇년 동안은 장사할 수 있지 않을까. 움베르토 에코의 한 소설에 문화부로 가지 못한 신세를 한탄하며 술 마시는 사회부 기자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탈리아도 사정이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99년 문화부로 탈출해 지금까지 있으니 기적적으로 변신에 성공한 셈이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 중엔 법조 출입 경력이 만 10년을 넘어가는 이들도 있다. 그곳에 오래 출입해본 사람으로서 말한다. 세상이 공평하다면 그들은 반드시 복받아야 한다.

도청사건 뒤로 또다시 검찰이 도마에 오른다. 검찰 제쳐두고 특별검사에게 수사를 맡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여당에서까지 나온다. 그걸 보다가 문득 ‘검찰이 이제 근대와 맞대면하고 있구나’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출입할 당시 검찰은 신문 1면 또는 사회면 머릿기사가 될 만한 기획 수사를 여러 건씩 하고 있었다. 예정돼 있는 큰 기사가 없다 싶은 날에 한 건씩 발표했고, 가끔은 정부가 비난받는 악재가 터졌을 때 큰 건을 발표해 국면전환을 돕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 한 일간지가 비리의혹 사건과 관련해 현직 장관이 도피성 출국을 했다는 오보를 낸 적이 있었다. 청와대가 노발대발했고, 검찰은 기자 한명만 구속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기 위해 청와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축적 사실도 검찰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수사를 시작한 건 그게 세상에 알려져 청와대의 허락이 떨어진 뒤였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전까지 검찰은 명실공히 행정부의 일원이었고 그 수장은 당연히 청와대였다. 물론 검찰은 행정부에 속하지만 추상 같은 법질서를 지켜야 한다는 업무의 특성 때문에 ‘준사법부’라고 부른다. 그래서 특정한 사건에 대해 청와대나 법무부 장관이 검찰에 이래라저래라 못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검찰의 철학과 판단 기준의 준거점은 청와대였다. 대통령의 아들을 구속하더라도 사전에 내락에 가까운 수준의 조율을 했고 그 공과를 모두 청와대의 것으로 돌렸다. 당시 큰 사건 수사에서 정의를 세우는 쪽으로 일을 도모하려고 최선을 다했던 몇몇 검찰 간부들을 소중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들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의 정의감은 충직이라는 가치를 배반하지 못했다.

루카치가 1930년에 쓴 <소설의 이론>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하늘에 빛나는 별이 모든 세상의 지도가 돼주었던 시절은 행복했다.” 검찰에 빗대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청와대가 수사의 지도가 돼주었던 시절은 행복했다”라고. 루카치의 표현엔 자연과 신, 개인의 질서가 조화를 이뤘던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향수가 담겨 있지만,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은 근대에 이르러 신이 사라진 세상에 혼자 던져진 개인이라는 존재를 부여안고 씨름해야 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운명이었다. 그 앞길은 불안과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가야 할 수밖에 없는 길이기 때문에 루카치는 소설을 옹호하고 축복했던 것 같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검사들과 텔레비전 토론회를 벌이면서 불화를 드러냈다. 그건 “앞으로 검찰의 공과는 검찰의 것”이라고, 청와대와 무관하다고 청와대의 입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도청 사건 뒤로 수사에 대한 청와대의 발언도 원론 수준에 머문다. 그러자 검찰도 주춤한다. 국가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기업을 마구 파헤쳐도 되는지,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뢰밭에 들어가도 되는지, 그 모든 수사의 기준이 무엇이 돼야 하는지 최고 권력자가 판단해야 하는 게 아니냐며 과거를 향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사에 나서면 여기선 이걸 트집잡고, 저기전 저걸 욕하고, 루카치가 말한 소설의 운명처럼 불안과 위험으로 가득 차 있는 게 눈에 보일 것이다. 새로운 질서 앞에서 뒤로 나앉느냐 한 걸음 내딛느냐, 검찰은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다.

임범 문화생활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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