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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23 17:03 수정 : 2005.11.05 00:59

유레카

우리나라에는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목을 내놔야 하는 두 사람이 있다. 교육인적자원부 장관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교육부 회의실에는 무려 47명에 이르는 역대 장관의 사진이 걸려 있다. 2001년 1월 첫 교육부총리에 임명된 한완상씨를 시작으로 부총리만도 5명이다. 교육행정의 수장으로 발탁된 만큼 모두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였겠지만, 상당수가 거센 비난을 받고 물러나야 했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소집 기간에만 지휘권을 주다가 1992년부터 감독 전임제를 시행했는데, 그 뒤 13년 동안 모두 18명이 거쳐갔다. 평균 재임 기간이 8개월 정도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불명예 퇴진이었다. 차범근 감독은 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멕시코와 네덜란드에 연패당한 뒤 대회 도중 쫓겨났고, 95년 4월 대표팀을 맡은 박종환 감독은 코리아컵 준결승에서 잠비아에 2-3으로 져 두 달 만에 물러나야 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퇴진 위기를 넘긴 이는 히딩크 감독이다. 부임 직후인 2001년 6월 대륙간컵대회(컨페더레이션스컵) 프랑스전에서의 0-5 참패가 시련의 시작이었다. 두 달 뒤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다시 0-5로 대패하자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이 경기에서 그는 연거푸 골을 먹으면서도 수비를 강화하지 않았다. 대신 공격형 수비 시스템인 ‘일자백 수비’를 시종 유지했다. 경기 뒤 그는 “수비만 강화하면 절대로 이기는 경기를 할 수 없다”고 태연히 말했다. 쏟아지는 비난 앞에서 “이것이 내 축구철학”이라고도 했다.

본프레레는 히딩크와는 참으로 조건이 달랐다. 대표팀 소집도 쉽지 않았고 훈련 기간도 짧았다. 코치진도 빈약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는 다른 데 있다. 본프레레가 사우디에 진 뒤에도 거듭 선수들의 문제를 거론한 반면, 히딩크는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김영철 논설위원 yc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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