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4 21:37
수정 : 2005.08.24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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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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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타고난 이야기꾼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라는 만화가 있다. 1970년대 초 공터에 비밀기지를 짓고 21세기의 미래세계를 꿈꾸던 켄지와 친구들은 악의 조직이 꾸미는 인류 멸망 계획과 그 위기를 구할 영웅들의 활약을 정리한 ‘예언의 서’를 만들었다. 1997년, 평범한 청년이 된 켄지는 세계가 자신이 쓴 ‘예언의 서’처럼 종말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켄지는 세계멸망을 획책하는 ‘친구’에 맞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20세기 소년>의 매력은 ‘세계정복’이라는 촌스러운 소재를 오늘의 감각으로 서스펜스하게 구성한데 있다. 지난 세기 세계정복은 고독한 과학자에게 있어 마지막으로 도달해야하는 로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징가Z>와 맞서 싸우는 헬 박사도, <로보트태권V>의 카프 박사도 그랬다. <20세기 소년>에서 친구는 그 불가능한 세계정복의 꿈을 치밀한 계획과 조직, 그리고 미디어를 동원해 이루어냈다.
지난 18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안기부 도청 테이프에 등장한 ‘삼성에게 떡값을 받은 검사 7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공개한 자료를 보면 수천만원대의 특별 떡값에 기본 떡값이 명기되어있다. 몇천원만 가지고도 사먹을 수 있는 떡인데, 수천만원의 뇌물을 떡값이라 부르면 듣는 떡 기분 나쁘겠다.
안기부 도청 녹취록에는 재벌과 권력의 결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는데, 문화방송과 노회찬 의원에 의해 공개된 부분은 삼성이 97년 대선을 전후해 이회창 후보와 정치권, 그리고 검사들에게 돈을 주어 관리를 했다는 내용이다. 아주 일부분만 밝혀진 도청 테이프의 내용으로도 돈을 전달한 홍석현 주미대사와 돈을 받은 의혹을 받고 있는 김상희 법무부 차관이 사퇴하는데 전모가 드러나면 참 가관이겠다.
도청 테이프 전체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현 시점에 보도되는 내용만으로도 그 주역을 담당한 삼성의 존재는 놀라울 뿐이다. 그들은 <20세기 소년>의 친구처럼,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만들고 대한민국을 지배하려고 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건희 ‘회장님’이 기업은 일류인데 정치가 삼류라고 일갈한 배경에도 다 이런 속사정이 있었구나. <20세기 소년>에서 친구는 살인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백신을 독점해 세계 대통령이 되었다.
21세기를 앞둔 20세기 한국에서 삼성은 자본의 힘으로 한국을 지배하려고 했나보다. 나는 그래서 도청 테이프에 들어있는 나머지 진실이 궁금하다. 참 이상한 것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도청 여부보다는 도청의 내용이 궁금한데, 왜 정부는 자꾸 도청 그 자체로 문제를 끌고 가는지 모르겠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말이다. 도청 테이프 안에는 더 치밀한 세계, 아니 대한민국 정복의 음모와 그 실행방안이 정리되어있어서 그런가?
참, 이번에 떡 먹다 들으면 체할만큼의 돈을 떡값으로 받아 잡순 검사들의 명단을 폭로한 노회찬 의원이 왠지 <20세기 소년>에 등장한, 기타 하나 들고 북쪽 끝에서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켄지와 닮아 보인다. 노회찬 의원은 떡값 검찰 명단을 공개하며 “나를 기소하고 싶은가? 기소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일갈했다. 후련하다.
박인하/청강문화대 교수·만화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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