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8.28 18:16 수정 : 2005.08.29 08:32

성한용 정치부 기자

아침햇발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29%까지 떨어진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도 여러가지 있겠지만, 최근의 직접 계기는 ‘엑스파일’이라고 불리는 녹음테이프로 시작된 국가정보원 불법도청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 사건으로 ‘역량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는 김승규 국정원장이 서 있다. 그는 7월11일 27대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8월5일 김대중 정부에서도 불법도청이 있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민에게 사과했다. 조직의 책임자로서 조직의 과거 범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한 일이다. 김 원장은 “내부적으로 많은 고뇌와 주저가 있었지만, (저희는) 진실을 보고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하였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교회 장로다. 국내담당인 이상업 2차장도, 김만복 기조실장도 교회 장로로 알려져 있다. 세 사람의 장로는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자. 그러면 (국민들이) 용서해 주실 것이다”라고 뜻을 모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백’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사람을 죽이긴 했는데,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왜 죽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고백할테니 용서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그들은 도청에 대해 직접 책임질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혹시 자신들의 자리 보전을 위한 ‘도덕적 결벽증’의 발로는 아니었을까?

아무튼 ‘고백’을 계기로 사건이 복잡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도청사건의 초점이 김대중 정부로 옮겨가자, 노 대통령과 김 원장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어리숙함으로 ‘헛발질’을 계속했다. 노 대통령은 18일 언론사 정치부장들과의 간담회에서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변명한 뒤, “(김대중) 정권이 책임질 만한 그런 과오는 없다”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24일 기자간담회에서는 “97년 대선후보들을 대선자금 문제로 조사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회창 후보 얘기를 했지만 김 전 대통령을 의식한 발언으로 비쳤다. 김 원장도 2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뒤늦게 ‘주워 담기’를 시도했다. 그는 “전직 직원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현실에서 대강의 정황과 일부 문서 등을 파악한 수준”이라면서도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도청이 과거와 달리 무차별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차별성 또한 분명하게 확인됐다”고 ‘말도 안 되는’ 설명을 했다.

이 와중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잘못이 있다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이종찬·임동원·신건 등 전직 국정원장들은 김 원장을 만나 ‘압력’을 가하는 무리한 처신으로 비난을 자초했다. 도청사건 이후 모두가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대한민국의 수준이 겨우 이 정도였던가. 한심하다.

이 모든 책임을 김 원장이 질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어설픈 고백이 상황을 엉망으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그 이후 진상규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현 정부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김 원장에 대한 법조계의 평가는 ‘무색무취’다. 무색무취는 무능과 종이 한 장 차이일 수 있다. 진실을 숨겼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문제는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엉성한 발표를 강행한 ‘무모함’에 있다. 또 지금까지도 진상을 규명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무능함’에 있다. 고위 공직자의 무모함과 무능은 법률적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역사적으로는 죄악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