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29 19:48
수정 : 2005.08.29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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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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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대통령은 지지율 29%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불만을 토로하고, 국민들은 대통령의 계속되는 푸념에 어이없어 하며 짜증을 낸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고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대선공약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대연정이니 선거구제 개편이니 내각제 개헌이니 하는, 서민생활과는 동떨어진 화두를 가지고 정치권은 손익 계산하기 바쁘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출범한 참여정부가 2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본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여러 각도에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영남 민주화 세력 출신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역사적인 관점에서 문제의 근원을 파헤칠 필요가 있다. 3당 합당으로 거대여당인 민자당이 출범할 즈음 영남 민주화 세력은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3당 합당에 합류하여 주류가 군사독재 세력인 통합정당의 체질을 내부에서 바꾸든지, 호남 출신이 주축이 된 개혁성향의 정당에 합류하여 고향에서 ‘배신자’ 소리를 듣든지, 아니면 독자적인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영남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최악의 경우 민주화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까지 고려해야 했다.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은 3당 합당을 맹렬히 비판한 후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구축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은 호남 출신이 주축이 된 개혁성향의 정당에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남은 노 후보에게 연이은 패배를 안겨주었으나,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는 노 후보의 집념은 2002년 대선 승리로 결실을 맺었다. 대다수 호남 유권자의 경우 비록 노 후보가 영남 출신이지만 노 후보의 비전에 공감하여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영남의 보수성향 유권자들도 영남 출신인 노 후보를 거부함으로써 지역주의보다는 이념과 가치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호남에는 개혁성향의, 영남에는 보수성향의 유권자들이 다수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2002년 대선은 맹목적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이념과 가치 중심으로 정치권이 재편될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실제 정계개편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다. 집권당내 소수파로서 정권을 잡은 영남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라는 가치보다는 영남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고 했기 때문이다. 양극화 해소와 같이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책보다 영남발전특위처럼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제안이 선거대책으로 더 중시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탄핵 역풍’ 총선 이후 열린우리당이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영남 민주화 세력은 여전히 소수파이기 때문에 이들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한나라당에 대한 대연정 제안은 영남 민주화 세력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포기해서라도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선거구제 개편이나 개헌 논의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논의는 현실정치인인 영남 민주화 세력에게는 절박한 문제일 수 있지만, 국민 대다수에게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다.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공학적인 논쟁으로 참여정부의 후반기를 시작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일까?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울 뿐이다.
임원혁/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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