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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1 18:39 수정 : 2005.09.11 18:39

홍기빈 캐나다 요크대 박사과정·정치경제학

야!한국사회

90년대 이래 대한민국이 계속 진통을 앓고 있는 문제의 하나가 교육이다. 교육 전문가와 관료 그리고 학부모, 기업까지 수많은 관계자들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내놓은 다양한 주장들의 갑론을박이 있어 왔으니, 오늘은 좀 색다른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냉전시대 대한민국 사람들의 경제적 행동 방식이 서구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달랐던 원인은 사회적 안전망이 거의 전무했다는 데에 있다. 의료, 교육, 주택, 실업 등 어느 것 하나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 제도적 배려로 해결되는 것이 없었고, 사람들은 인생에서 반드시 한번씩은 부딪히게 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알아서 방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가계 저축률이 엄청나게 높은 나라가 되었고, 이것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노후 대책의 문제는 다른 것들과 달리 단순히 저금통장을 두둑히 하는 것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예전 같지 못한 기력과 건강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스스로 챙겨야 하는 노후는 온갖 불안함으로 꽉찬 시기일 수밖에 없다. 이 불안한 여정을 액수와 한계가 뚜렷이 정해진 저금통장에 기대기보다는 자신의 안녕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무한히 돌보아줄 누군가를 한없이 믿고 의지하는 쪽이 훨씬 더 든든하다.

그러니 저금 통장보다는 차라리 그 돈을 털어 자식 교육에 쏟아부어 자식이 좋은 대학 나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만들어주는 편이 훨씬 낫다. 자식들도 오늘이 있게 하여준 자신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니 결국 교육에 들어간 돈과 정성은 모두 자신들의 노후에 대한 일종의 ‘투자’나 마찬가지가 될 터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 유명한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라는 것도 무슨 인간 능력과 정신의 계발·고양 따위의 고상한 욕망의 발로라기보다는 사회 시스템의 부재와 가부장적 가족 관계라는 조건에서 등장한 독특한 노후 대책 경제 제도일 뿐이다.

현재의 교육 경쟁 열풍을 주도하는 대한민국의 중산층들은 이 제도를 계승하여 재테크의 시대 21세기에 걸맞게 발전시키고 있다. 그저 막연하게 ‘좋은 대학 들어가서 훌륭한 사람 되어라’고 생각했던, 어찌보면 어수룩했던 어제의 학부모들과 달리, 이들은 좀더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자산 관리’의 시점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매니지먼트’하는 방법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들은 아이들이 젖 뗀 시점에서 대학 졸업의 시점까지에 걸친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배워두어야 할 재주들과 거쳐야 할 종류의 학교를 그 지리적 위치까지 고려하여 조직적으로 실행에 옮긴다. 이제 학부모 노릇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하다.

사람을 ‘경제적 범주’로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이다. 노동자가 ‘비용’도 되었다가 ‘고용과 해고가 유연 탄력적이어야 할 용역’도 되는 세상이니 자식을 ‘자산’으로 여기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으며, 그 학부모들의 자식 사랑을 의심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뜨거운 사랑이야말로 사교육 시장을 떠도는 엄청난 규모의 액수가 절절히 증명하는 바이다. 단지 ‘인간 사회의 대부분의 잔인한 짓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다’는 격언을 기억해 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자식의 ‘반포보은’을 전제로 한 그 노후 대책의 전략이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인가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 전략의 수혜자로 자라난 우리 세대가 과연 우리 부모들에게 어떻게 보답하고 있는가를 보는 게 한 방법일 것이다.

홍기빈/캐나다 요크대 박사과정·정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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