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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3 17:50 수정 : 2005.09.13 17:50

김종구 논설위원

아침햇발

다른 사람들이 외국 사례를 빗대 우리의 현실을 한탄하는 것을 평소에 별로 마뜩잖게 여겨 왔는데 제가 그런 어줍잖은 꼴이 됐군요. 지난 1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미국 사회를 관찰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려 봤는데, 그 중에는 교육 문제도 포함돼 있습니다. 사실 미국의 교육환경이 우리보다 나은 점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부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고민들에서 미국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서울 강남지역 출신의 서울대 진학률을 놓고 말들이 많은데,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버드대의 경우 부유층 자녀들의 입학률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뉴욕타임스>는 “하버드대의 다양성이란 것은 캘리포니아에서 온 부유층 학생과 뉴욕 출신의 부유층 학생을 한 기숙사 방에 넣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지금처럼 들어맞는 때가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교사들은 어떤 학부모를 싫어하는가”라는 제목의 표지기사를 실어 교육현장에서 빚어지는 교사와 학부모 사이 갈등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갈등 양상이 우리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미국 교육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름아닌 글짓기 교육이었습니다. 첫째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치른 글짓기 시험 이야기를 하더군요. 주제는 “선생님이 이상한 상자 하나를 갖고 교실에 들어와 교탁 위에 놓은 뒤 아무 말 없이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를 상상해서 기술해 보라.” 그런데 요구사항이 정말 까다로웠습니다. 글은 다섯 단락으로 구성하고, 각 단락에는 5~7개의 문장이 들어가야 한다. 첫번째 단락의 첫 문장은 ‘대화’나 ‘행동’, ‘상상’ 가운데 하나로 시작하라. 각 단락에는 반드시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가운데 하나를 넣고, 은유법이나 직유법을 활용하라. 마지막 결론 단락은 느낌·교훈·행동·기억·감정 가운데 2~3개를 사용해서 끝맺으라.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자신 학창 시절 은유나 직유법이 들어가는 글을 써 보라는 식의 글짓기 수업을 받아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고작해야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는 무슨 비유법? 은유법.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에서 사용된 수사기법은?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진 공감각적 표현. 이런 식의 문제풀이에만 매몰돼 있었지요. “한국 학교에서 글짓기를 하면 언제나 ‘통일’ ‘불조심’ ‘양성 평등’ 등의 주제만 내주어요. 미국에서 글짓기 하나는 확실히 잘 배우는 것 같아요”라는 게 아이의 말이었습니다.

미국 학교의 글짓기 교육이 어릴 때부터 매우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인 둘째아이의 숙제를 도와주면서였습니다. “우리 집 전통 두 가지를 쓰라”는 게 숙제였는데, 학교에서 나눠준 종이에 아예 ‘첫째’, ‘둘째’, ‘결론’이라고 써넣고 글을 쓸 공간에 밑줄까지 그어놓았습니다. 단락마다 한 문장에 그것을 보태어 설명하는 문장을 덧붙이라는 식이었습니다.

요즘 대학 논술시험 문제로 연일 시끄럽습니다. 문제는 초등학교 때부터의 체계적인 글쓰기 훈련도 없이 대학 논술시험으로 건너뛰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지요. 논술 과외에서는 잘 가르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과외는 그냥 과외일 뿐입니다. 공교육 현장의 글짓기 교육을 어떻게 체계화하고 강화할 것인지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로 글을 끝맺겠습니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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