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13 17:55 수정 : 2005.09.13 17:59

조선희 소설가

세상읽기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 시즌3에 합류한 김수미는 입만 열면 육두문자다. “이 똥물에 튀겨 죽일 년”, “남의 말을 똥구멍으로 씹냐”는 대사가 지상파를 타고 나올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일상적인 언어생활에는 폐수가 넘실대도 지상파 방송만은 청정수역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 이름은 김삼순>의 삼순이도 만만찮게 입이 걸었다. 방송뿐인가. 한겨레에 김어준씨가 쓰는 칼럼에는 ‘씨바’가 후렴구처럼 등장한다. 고대-이건희 해프닝에 대해 ‘울다가 웃어서’ ‘털이 난다’고 썼다. 그가 창안해 지금은 하나의 유파를 형성한 ‘엽기체’가 인터넷에서 종이신문으로 진출한 것이다.

공적인 공간의 말씨들이 달라지고 있다. 한편으론 험구(險口)들이 늘어나는 거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만큼 자유롭고 다채로워진 것이다. 또한 대중매체의 언어가 일상생활의 언어를 닮아가는 것이다.

18세기 말, 정조 연간에 문체반정이 있었다. 시시콜콜한 살림살이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소설과 에세이가 인기를 끌면서 문체들이 자유분방해지자 정조가 공권력을 동원해 단속한 것이다. 글이란 모름지기 우주의 이치와 인륜의 도덕을 논해야 하거늘, 어디 돼먹지 못하게 나약하고 비속한 글나부랭이로 세상을 타락시키느냐, 는 식이다. 정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주범으로 단정, 그에게 고전적인 문체에 충실한 글을 지어 올리도록 했다. 과거시험을 거부하고 제도권 바깥으로 도는 박지원을 어르고 달래서 휘하에 두려는 게 정조의 속셈이었지만 박지원은 반성문을 쓰는 대신 절필을 했다.

1940년 무렵 이태준이 <문장강화>를 쓸 때는 이제 막 지식인들이 한글로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이다. 한글은 만들어진 지 400여 년 만에 주류의 언어가 되었지만, 아직도 중국 고전에 의탁하지 않고는 한 줄도 못 쓰는 지식인들이 많았다. 일종의 한글교본인 <문장강화>에서 이태준은 ‘고담준론’ 강박에 시달리는 당대 지식인들에게 “말하듯 쓰면 된다. 지껄이면 말이요, 써놓으면 글이다”라고 말했다. 자기 감정과 생각을 살리라는 것이었다. 사람들 머리 꼭대기 위에서 놀던 글을 생활과 감정 가까이 옮겨놓는 작업에 있어 이태준은 박지원의 대를 잇는다. 이태준의 일갈. “과거엔 문체를 시대가 가졌고 현대엔 문체를 개인이 가졌다.”

시대가 바뀌면 문체도 바뀐다. 노무현 대통령의 논란분분한 말 스타일도 이 맥락 위에 있다고 본다. ‘급격한 변화는 시기상조이지만 본인은 정치와 경제의 발전을 위해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다’ 식으로 대략 100 단어 안에서 이루어졌던 역대 대통령의 어법은 솔직히 말해 지루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상투어로 뜨개질하는 것이 책임 있는 정치인의 말은 아니다. 신문에 한줄 인용되기 위해 정치인들이 경쟁적으로 내놓는 화려한 비유법의 수사학 역시 막연한 상투어만큼이나 지루하다. 정치인들의 말도 일상적인 생활과 감정에 좀더 다가왔으면 반갑겠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김소희 기자가 쓰는 ‘오마이섹스’가 요즘 사석에서 화제다. 정론을 표방하는 시사주간지가 원초적 본능 앞에 적나라하게 커밍아웃한 것이 적이 충격이었다. 신문은 매일 웰빙 얘길 하면서도 섹스 얘기는 안한다. 하지만 퇴계도 낮퇴계 밤퇴계가 있다는데, 허리아래의 욕망이 ‘공식적으로는’ 없는 척하는 ‘내숭의 카르텔’이 언제까지 유지될까. ‘오마이섹스’는 공적인 언어가 우리의 솔직한 감정에 한 발짝 다가왔다는 표시다.

이태준이 말한 현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개인문장은 아직 명일(내일)에 속한다”고 말했지만, 지금 우리 역시 그 명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조선희/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