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15 17:50
수정 : 2005.09.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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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문화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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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보름쯤 전, 그러니까 지난 8월 말에 임상수 감독을 만났다. 예사로운 술자리였고, 마침 그가 감독해 소송이 진행 중인 <그때 그사람들>의 피고 쪽(영화 제작사인 명필름) 변호인이기도 한 조광희 변호사도 함께 있었다. 거기서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조금 있으면 (‘그때 그사람들’이) 토론토 영화제도 가고 미국 개봉도 해야 하는데, 계속 앞뒤 부분 잘린 상태로 상영해야 하느냐 말이야. 나도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이고, 이 소송이 끝까지 가서 판례를 남기도록 하고 싶지만 언제든지 저쪽(소송 원고인 박지만씨 쪽)에서 취하해 버리면 끝 아니야? 애매하게 시간만 더 끌다가 소송이 취하되는 사태를 맞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저쪽에 유감 표시라도 하고 합의해서 취하하도록 하면 당장이라도 온전한 영화를 보여줄 수는 있잖아!” 육두문자를 아끼지 않는 비타협주의자로 소문난 임 감독의 말치곤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조금 더 들으니 이해가 갔다.
알려진 대로 10·26 사건을 다룬 <그때 그사람들>은, 개봉 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씨가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그게 법원에서 받아들여져 영화 앞뒤에 들어간 다큐멘터리 장면이 잘려나간 채 개봉했다. 그 뒤 박씨가 본소송인 명예훼손 소송을 내 계류 중인데 박씨 쪽에서 소송을 취하하면 잘려나간 다큐 장면을 그대로 붙여 상영할 수 있게 된다. 명필름 쪽이 승소했을 때 필름이 복원되는 건 물론이다. 나는 다큐 장면을 자르라고 한 가처분 판결이 부당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그게 아니다. 자기 영화가 불구가 된 상태로 관객에게 보여지는 걸 참아가면서 판결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의 무게감이 창작자에게 간단찮을 거라는 얘기다.
“잘리기 전에 영화 봤지? 앞의 다큐 장면에서 당시의 정치적 격변을 말해 놓고 그 다음에 요정 안 풀장의 반라의 여인들이 등장하잖아. 두 장면의 대조를 통해서 의도가 살아나는 건데 다큐를 자르니까 영화가 무턱대고 여자 가슴부터 비추면서 시작하잖아. 그걸 보면 삼류영화 같아서 미치겠는 거야.” <그때 그사람들>은 올해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소송이 계속된다면 그곳 관객들이 ‘무턱대고 여자 가슴부터 비추’는 영화를 보는 걸 임 감독은 감내해야 한다. 상황이 이쯤 되면 ‘싸워서 판례를 남겨야 한다’는 명분보다 ‘필름 복원’이라는 실리를 찾자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 등급보류 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던 조광희 변호사도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이다. 하지만 소송을 변호사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터. 자기 의견을 피력하면서도 임 감독의 말을 경청했다. 아쉬울 것 없는 나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 하는 토를 달면서 원칙론을 폈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최근 소송의 두 당사자는 화해 시도를 했지만 결렬됐다. 조 변호사는 “박씨 쪽에서 국외 상영에 다큐를 붙이는 건 가능해도, 국내 상영에선 불가능하다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화해하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한가위를 향해 둥글게 부풀어가는 저 달을, 임 감독은 지금 토론토에서 보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 ‘여자 가슴부터 나오는’ <그때 그사람들>을 보고서 또다시 분통 터져 술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가위를 맞아 그에게 덕담 삼아 한마디 보낸다.(위로가 될지, 약올리는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의 표현의 자유가 임상수의 속쓰림을 먹고 자란다!”
임범 문화생활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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