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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5 17:58 수정 : 2005.09.15 18:01

유레카

철면피.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다. ‘원조’는 중국인 왕광원(王光遠)이다. 재주가 뛰어났다. 출세욕도 강했다. 진사가 된 뒤 온갖 아첨을 일삼았다. 이를테면 고관이 습작한 시를 보며 찬가를 불렀다. “이태백도 감히 미치지 못할 신운이 감도는 시입니다.” 손 비비는 광원에게 한 고관이 채찍을 들고 말했다. “자네를 때리고 싶다.” 광원은 언죽번죽 답했다. “대감의 매라면 기꺼이 맞겠습니다.” 대감은 살천스레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도 광원은 화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광원의 얼굴 가죽은 쇠를 열 장 겹쳐놓은 갑옷 같다”(光遠顔 厚如十重鐵甲).”

그래서다. 누군가를 철면피로 부르면 큰 욕이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말에는 으레 경멸의 눈빛이 따른다. 철면피가 되려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주관적 생각과 객관적 실천은 언제나 큰 차이가 있다. 철면피로 손가락질 받는 사람 대다수는 결코 자신을 철면피로 생각하지 않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줄이어 목숨을 끊고 있다. 마흔여덟 살의 화물노동자 고 김동윤이 가족에게 남긴 마지막 문자는 눈시울을 슴벅이게 한다. “여보, 당신에게 너무 미안해. 너무나 가슴 아프다.” 고인의 여동생은 통곡하며 화물노동자들에게 호소했다. “다시는 화물노동자가 숯덩이가 되지 않는 세상을 꼭 만들어 주세요.” 이에 앞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류기혁도 목을 맸다. 레미콘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선 한국노총 김태환 충주지부장이 육중한 레미콘차에 깔려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그랬다. 비정규직의 비극이 곰비임비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은 변화가 없다. 철면의 정부다. 아울러 톺아보고 싶다. 철의 얼굴은 과연 참여정부의 저 근엄한 철면피들만 지녔을까. 한가위 둥근 보름달에 문득 얼굴을 비춰보고 싶다. 열 겹의 철갑 ‘왕광원’이 나타나지 않을까.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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