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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19 17:48 수정 : 2005.09.19 17:48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칼럼

국도변에서 ‘낙석 주의’ 표지판을 볼 때마다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라구?’같은 개그적 의문이 절로 생겨난다. 차의 속도를 늦추고 조심스럽게 가라는 것인가, 아님 돌이 떨어지기 전에 쏜살 같은 속도로 지나치라는 것인가, 그도 아니면 차를 돌려 다른 곳으로 우회하라는 것인가. ‘낙석 주의’ 표지판에서 ‘사고 다발지역’같은 경고문이 가지는 사전 예방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낙석이 되지 않도록 미리 조처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다. 하지만 낙석사고가 생겼을 경우 ‘낙석 주의’ 푯말은 그 사고를 수습해야 할 책임이 있는 행정기관에게 최소한의 면피의 근거가 된다.

아직도 우리나라 행정기관의 일처리 방식에서 ‘낙석 주의’식 태도를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얼마 전 양팔장애가 있는 여성이 어렵게 통과한 운전면허 기능시험이 물거품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기능시험을 통과한 뒤 1년 안에 도로 주행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학과시험부터 다시 치러야 하는데, 서울의 한 지자체가 예산부족과 사고가 날 경우 보험처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도로주행 연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지자체는 전국을 통틀어 한대밖에 없다는 족동차(두 발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는 장애인 특수차량)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그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장애인 전용연습장에서 연습을 해 기능시험에 합격한 장애인의 처지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일이다. 서울시로부터 예산 지원을 받으면서도 주행교육을 하지 않는 것은 지자체의 실천의지가 부족하다는 게 장애인 단체들의 주장이지만, 10년 전부터 국내 최초로 장애인운전 연습장을 개설하고 시각장애인 축구장 운영 등 다른 곳보다 더 장애인 복지에 신경을 써왔던 해당 지자체의 심정도 이해못할 바는 아니다. 다른 자식들이 거북해 하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아예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 다른 며느리들에 비해 구설수에 오르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다소 억울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동권과 같은 최소한의 기본권을 확보하려는 장애인들의 절박함 앞에서 그런 억울함은 사치에 불과하다. 족동차를 구비하고 무료 기능교육까지 했으니 주행교육에 필요한 특수 차량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의 답변은 낙석주의 표지판과 다르지 않다. ‘장애인들의 인권보호와 사회적응을 돕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자동차 운전면허 취득이라고 생각한다’는 해당 지자체의 지론이 진심이라면 ‘목마른 사람이 우물파라’는 식의 태도는 옳지 않다.

2년 전 국내에서 처음으로 족동차를 만든 이는 두 다리를 못쓰는 지체1급 장애인이다. 그는 20여년 전에 자신이 운전하기 위해 발을 안쓰고 손으로만 운전하는 차를 만들었고, 청와대와 교통관계 부처에 수없이 탄원서를 넣어 1983년에 장애인 운전면허 제도가 도입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그가 족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은 텔레비전에서 어떤 양팔 장애인이 발로 운전하는 차를 구하려고 애쓰는 것을 본 직후다. 돈벌이가 되지도 않는 일에 2년의 시간과 1억5천만원의 비용을 들였다. 나는 장애인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는 속담이나 ‘동병상련’의 고사성어에 지나치게 기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건전지가 없어 방치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하다. 그런 시계를 가리켜 그래도 시계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정확성은 있는 셈이라고 한다면 그게 바로 부조리극이다.

장애인 문제에 관한 영역에서는 동병상련의 감정법칙이 통용되지 않을 수 있어야 성숙한 사회다. 족동차로 도로주행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야 마땅하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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