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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0 17:56 수정 : 2005.09.20 17:56

곽병찬 논설위원

아침햇발

지난 14일 서울 둔촌동 보훈병원에는 진귀한 손님들이 방문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 한국군 등과 맞서 싸웠던 베트남 재향군인회 소속 참전 군인들이었다. 이들은 베트남 전장에서 미군이 쏟아부은 고엽제 세례를 받고 후유증에 시달리는 한국군 상이군사들을 만나 위로했다.

이 진귀한 만남에서 팜하우봉 재향군인회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과 베트남이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굳게 맺어지도록 합시다. 이를 위해선 서로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상처를 입혔던 당사자들이 먼저 화해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꼽히는 이 전쟁에 한국군은 미국의 요청과 박정희 정권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참전했다. 우리와 베트남 사이엔 어떠한 원한도 갈등도 없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패권을 쥐기 위한 미군의 세계전략에 한국군은 그저 끌려들어갔을 뿐이었다. 거기서 한국군은 무시무시한 ‘정글의 무법자’로 악명을 떨쳤다. 그때 우리 젊은이들은 원주민 마을을 청소하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되뇌었다. 그러나 인도차이나를 포함해 지구상에 평화의 싹이 돋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패퇴가 분명해지면서부터였다. 그 더러운 전쟁에서 고통을 당한 베트남 군인들이, 과거 자신들에게 고통을 준 이들을 찾아와 위로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니 얼마나 경이로운가.

개인이나 나라 사이에 가장 큰 벽은 불신이다. 불신은 긴장과 갈등과 충돌을 일으킨다. 정치인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들이나 공동체에 대한 불신을 조장한다. 적개심과 공포까지 얹혀준다. ‘베트콩’은 그런 상징 조작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조작되고 강요된 불신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야만성과 공격성을 끌어낸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의 학살은 그 좋은 실례였다.

이번 베이징 6자 회담의 큰 수확은 한반도 허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깊은 불신의 강을 넘기 위한 배를 띄웠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불신했고, 불신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던 북한과 미국이 신뢰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미국은 평화에 대한 북한의 의지를 나름대로 평가했다. 북한 역시, 아직은 ‘말’에 불과하지만 미국의 불침략 약속을 접수했다. 지금까지 두 나라가 보였던 불신을 전제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합의문의 모호성으로 인해 도강의 가능성을 낙관할 수 없다. 그러나 철천지 원수나 악의 축으로 비난하고, 불바다와 선제 핵공격을 공언하던 이들이었으니 큰 진전이다.

문제는 남쪽 사회를 가로지르는 불신의 강이다. 그 탁류는 한반도 평화정착의 분기점이 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가로막고 있다. 맥아더 재평가를 놓고도 물리적 충돌을 일으킨다. 증오와 불신은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고, 정체 속에 가둬두고 있는 셈이다.

베트남은 지금 아시아의 새로운 용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 바탕엔 관용의 정신이 있다. 피해자이면서도 스스로 불신과 적개심을 걷어냈다. 앞장서 가해자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로했다. 베트남 곳곳엔 전쟁기념비,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아픈 역사를 기억할 뿐 자신들을 증오에 가두지는 않는다.

건국과 통일의 아버지 호찌민은 이렇게 유언했다. “전후 남베트남의 누구도 미워해선 안 됩니다. 군인도 경찰도 강요된 싸움을 했고, 살기 위해서 그리했습니다. 모두 한 민족으로 동등하게 대우해야 합니다.” 호찌민은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 이 말은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것 같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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