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0 18:04
수정 : 2005.09.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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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 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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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망대
<파이낸셜 타임스>는 올 여름 <뉴욕 타임스>를 제치고 기업인 등 오피니언 리더들이 뽑은 ‘세계 최고의 신문’으로 각광받았다. 센세이셔널리즘의 배격과 심층분석을 특기로 하는 그들의 전통은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도 진가를 발휘했다. 미국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월스트리트 저널> 등이 한국경제를 호되게 후려치고 기업매각을 종용할 때, 파이낸셜 타임스는 마틴 펠드스타인, 제프리 삭스, 로버트 웨이드 등에게 아낌없이 지면을 내주면서, 국제통화기금(IMF)의 가혹한 처방이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회복불능 상태로 만들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웨이드는 칼럼에서 ‘물고문’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지나친 고금리 정책을 비판했다. 예상대로 한국경제는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고, ‘줄도산’과 ‘코리안 세일’을 거치면서 현재 45%의 주식이 외국인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난해 말부터 시작된 일련의 한국경제 관련 보도들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오히려 ‘세계 최악의 신문’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이제 파이낸셜 타임스가 한국경제 후려치기의 대타로 나선 느낌마저 든다. 뒤늦게 국제 투기자본의 폐해를 절감한 정부가 외국인 이사 수를 제한하겠다고 운을 떼자, 애너 파이필드 한국 특파원은 11월31일치 머릿기사와 해설기사에서 익명의 금융기관 간부 말을 인용해 “한국이 완전히 정신분열적 태도를 보인다”고 했고, 사설은 “경제적 민족주의가 한국의 미래를 위협한다”고 비판했다. 외국에서 흔히 시행되는 제도라도 영·미식 기준에 조금 어긋나면 ‘국수주의’쯤으로 매도된다.
조세회피지역을 통한 탈세행위는 영·미식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시장경쟁’마저 저해하는 것인데도,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 3월 한국의 조세회피 규제 방침을 비판했다. 사실 버뮤다 케이만 버진아일랜드 등 대표적 조세회피지역은 대부분 영국령이다. 그 후에도 많은 적대적 기사를 써온 이 신문은 며칠 전인 13일에는 “한국 언론은 외국 투자자들이 망가진 경제를 재건하는데 도움을 준 것을 고마워하기는커녕 악마로 치부한다”며 “한국인들은 신음소리를 내는 대신 외자유입을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환위기 직후와는 180도 다른 보도태도가 아닐 수 없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정신분열적’ 보도태도는 원인진단이 쉽지 않지만 짚이는 데가 있다. 외환위기 직후 빚잔치 때는 미국 금융자본의 원금회수와 기업사냥이 현안이었다면, 지금은 나중에 대거 진출한 영국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한국 금융정책과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사 수 제한에 대한 그 신문의 비판은 영국계 에이치에스비시(HSBC)가 제일은행 매입을 시도할 때 나왔고, ‘외국자본 차별론’이 집중 제기된 것도 영국계 펀드인 헤르메스의 시장조작 혐의와 브릿지증권의 편법 투자금 회수 등 불공정행위를 금감위가 조사하기로 한 때이다.
영국 언론의 경제뉴스 보도가 런던 금융가인 ‘시티’의 이해관계에 크게 좌우돼온 사실은 영국에서도 연구된 바 있지만, 그런 유착관계가 자국자본을 감싸고 자국제도를 세계표준이나 되는 것처럼 타국에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더욱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과거 탐험가와 선교사들이 더러 제국주의 앞잡이 구실을 했듯이, 경제기자들이 경제전쟁의 첨병으로 뛰는 것을 의미한다. 외환위기 당시 파이낸셜 타임스의 역할을 회상해보면, 제국주의가 약소국을 돕는 경우는 경쟁국을 견제할 때뿐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하긴 구한말 영·일동맹과 3국간섭도 그런 것이었으니….
이봉수/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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