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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정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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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지난 9월19일 제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가 공동성명을 만들어 냈다. 몇 차례 결렬 위기를 넘기면서 만들어낸 성과다. 합의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공동성명 발표 직후 북한 외무성의 반격적 담화에 역설적으로 잘 드러난다. 경수로 제공을 핵 포기의 전제조건이라면서 합의문에 명기된 “적절한 시기”의 의제를 선점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공동성명의 잉크가 채 다 마르기 전에 벌써 파국을 맞은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비관도 낙관도 이르다. 다자합의 동북아 협력에 중요한 의미 이번 합의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약속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6자회담의 진정한 성과는 앞으로 외교적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공동성명 도출이 동북아 국제질서의 진행에 의미하는 바는 실로 크고 중요하다. 합의 구조를 이뤄낸다는 자체가 협력질서 형성에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의 형식은 6개국 합의의 다자적 성격이었지만 실제 핵심은 북-미 양국간 합의 틀이었다. 이번 공동성명으로 1994년 제네바 핵 합의는 마침내 공식적으로 폐기되었지만, 1994년 기본합의와 2005년의 공동성명은 본질에 있어 동일한 연장선에 서 있다. 외교적 합의란 관련국들간 상호 이익의 내용과 범위를 인정하고, 맞교환하는 행위다. 1994년의 합의는 북-미 양국간 비확산과 체제보장이라는 이익을 맞교환한 것이었다. 지난 11년간 북한과 미국은 그 맞교환의 한계 범위를 서로 넘나들며 위기를 가중시켜 왔던 터였다. 경수로등 곳곳에 지뢰 숨겨져 있어 이번 공동성명의 본질적 성격은 1994년의 기존 구도를 재확인한 것이다. 다만, 94년이 핵동결의 약속이었다면 2005년은 그보다 한 단계 진전된 “핵포기”의 약속을 담았다. 아울러 미국은 94년의 핵무기 불위협과 불사용 약속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재래식 무기로도 북한을 공격하지 않을 것을 확약하고 있다. 체제보장과 비확산의 맞교환 구도를 재확인하는 한편, 한층 진전된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여기에 더하여 94년 합의가 양자간 합의였다면 이번 공동선언은 다자적 합의라는 형식을 가진다. 다자주의적 합의틀은 미국이 속임수에 대한 비용을 홀로 지불하지 않겠다는 계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북아 국제정치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북아 질서가 냉전형의 대립질서로 치닫느냐, 아니면 다자적 합의틀 형성에 성공하며 협력적 질서로 나아가느냐의 분수령이 이번 6자회담에 주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공동성명이 갖는 시대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지뢰는 곳곳에 숨겨져 있다. 우선 이번 합의문 도출에 마지막 난관이었던 경수로 문제를 다시 논의할 시점과 후속행동과의 조건적 상관성도 복잡한 문제다. 논의의 개시와 북한의 국제기구 복귀는 동시행동 원칙으로 타결한다고 하더라도, 핵 포기에 관한 검증과정 또한 복잡해 언제 어디서 폭발할지 모르는 지뢰밭을 지나는 형국이다. 경수로 제공이 94년형 맞교환과 직접 관련된 사안인지도 논리가 불분명하다. 체제보장·비확산 넘는 이익 인정해야 앞으로 북미관계를 진행시킬 동인은 양국간 관계정상화 과정이다. 관계정상화는 체제보장과 비확산의 이익 맞교환 구도를 공고하게 해주는 제도적 장치다. 그러나 이는 체제보장과 비확산의 교환구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이익을 상호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이를테면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와 북한의 경제회생과 발전의 동기를 관계정상화 과정에서 교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에너지 지원, 경제협력, 테러 지원국 해제, 미사일, 미국의 북한 인권법 등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북한은 관계 정상화가 이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과정의 끝에 비로소 관계 정상화라는 기착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4차 회담에서 북미 양국이 관계정상화 필요성에 합의한 것은 대단한 성과다. 과제 해결 과정에서 의심과 경계(警戒)를 넘나들며 조금씩 축적될 상호신뢰만이 유일한 희망처럼 보인다. 향후 한국도 동북아에서 국가간 신뢰를 확대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건설적 역할을 자임하는 것에 외교적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김기정/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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