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1 21:19
수정 : 2005.09.2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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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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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한가위 연휴 마지막 날 발표된 6자 회담 공동성명에는 굵직굵직한 내용이 들어 있다. 북한 핵무기와 핵계획 포기, 북한 체제보장과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 북한의 핵에너지 평화적 이용 권리 존중과 대북 에너지 지원, 한반도의 영구 평화체제 협의를 위한 포럼 구성, 동북아의 안보협력 방안 논의 등이 줄을 이었다. 구체적 시간표와 이행 방안이 명시돼 있지 않아 언제 휴짓조각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으나, 첫술에 배가 부를 리 없다. 과제들이 백화점식으로 나열돼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의 문제들이 한반도를 중심에 두고 칡넝쿨처럼 꼬여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불편이 없어 별로 의식을 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잠시 눈길을 바깥으로 돌려 비교를 해 보면 이 땅이 어처구니없는 일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된다. 동서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16년이 돼 가지만,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는 냉기류의 위세는 그다지 수그러들지 않았다. 백만이 넘는 병력이 가공할 화력으로 무장한 채 밀집된 형태로 대치하고 있는 공간은 지구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불안한 정전체제가 항구적인 평화체제로 바뀌지 않고 50여년 지속되고 있는 것은 불가사의에 속할 일이다. 흔히 1천만으로 일컬어지는 이산가족들의 거의 대다수가 꿈에도 그리던 상대방을 만나기는커녕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현실을 지구촌의 사람들이 납득을 할 수 있겠는가?
참혹한 상처들이 한반도 사람들에게 역사적 소명을 주고 있다는 주장들도 있다. 식민통치에서 분단, 전쟁, 학살, 폭압통치에 이르는 시련의 과정에서 입은 희생을 거름으로 삼아 인류의 한풀이와 상생을 이루기 위한 이론과 실천이 한반도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대중적 문화상품인 영화에 한정시켜 보더라도 수긍이 가는 구석이 없지는 않다. 겨레의 아픔이 녹아 있는 ‘공동경비구경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 투 동막골’ 등의 작품은 한국인이 아니라면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이 작품들이 외국에 수출돼 외화도 벌어들이고 한반도의 현실 이해를 도와주는 구실을 한다면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한많은 역사적 경험 그 자체가 좋은 유산이라고 외칠 수는 없다. 그 혹독한 과정에서 한 개인이, 가족이, 겨레 전체가 치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단적으로 입은 폐해의 하나로 상상력 속박을 빼놓을 수 없다. 3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금단의 땅으로 돼 있어 통 큰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나는 본지 금요일치에 나오는 지성섹션 ‘18.0°’에 연재되는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여행’을 부러운 마음과 함께 재미 있게 읽는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시작돼 북쪽의 역사 유적지를 거쳐 연변, 연해주, 바이칼호나 비단길로 이어지는 자전거기행이 나올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6자 회담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통부 차관보는 회담 폐막 뒤 “우리를 위한 역사를, 우리 스스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며 감회를 털어놓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냉정 유지를 미덕으로 삼는 외교관으로서는 이례적 표현이다. 자부를 하기에는 앞으로 갈길이 아득하다. 포부나 의지만으로 풀릴 일도 아니다. 다른 당사국들의 열린 마음과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적절히 자극해 협조를 이끌어내야 하니 더욱 슬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6자의 조율된 노력으로 연주하는 한반도 교향곡을 듣고 싶다.
김효순/편집인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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