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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2 18:30 수정 : 2005.09.22 18:30

이상수 베이징 특파원

아침햇발

이태 전 베이징 특파원으로 왔을 때 개인적으로 당시 열두 살이던 딸 슬비의 진학 문제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중국학교에 보내느냐, 한인학교에 보내느냐, 아니면 외국인학교에 보내느냐 하는 문제였다. 본인 의견을 물었더니 영어로 수업하는 외국인학교를 택했다. 영어는 서너 해 배워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선택도 일장일단이 있었으나 본인의 생각을 존중하기로 했다.

서방식으로 가르치는 이 학교는 한 해에 적어도 십여 차례 학부모를 학교로 불러들였다. 학습 내용을 표현한 전시회를 열기도 했고, 아이들이 직접 찍은 학습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몇 차례 짬을 내어 학교에 가 본 느낌은 초등학교치곤 제법 심각한 주제를 다룬다는 인상이었다. 아이들이 몇 달 걸려 함께 찍은 영화는 세계의 식량문제였다. 지난 6월 교실 복도를 이용해 전시한 주제는 ‘공해’였다. 공장 폐수나 차량 배기가스가 어떻게 물과 공기를 더럽히는지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공장과 생태계 모형 앞에서 참관자들에게 설명했다. 이런 심각한 주제를 배우면서 슬비는 신기하게도 학교 가길 즐거워한다.

‘환경오염전’을 보고 난 뒤 슬비에게 ‘공해’에 대해 반 아이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18명의 아이들 가운데 영어가 서투르거나 주의가 산만한 둘을 빼고는 전원이 ‘대기오염’ ‘생물화학적 산소 요구량’ 등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 주제를 한국의 교실처럼 가르쳤다면 한 학급에서 이런 개념을 이해할 아이가 4분의 1을 넘어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학교 아이들은 한 학기 내내 스스로 자료를 뒤지고 주변에서 환경오염원을 조사해 보았을 뿐 아니라, 이 내용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한 뒤 부모들 앞에서 설명까지 했다. 수업에 정상적으로 참가하기 어려운 아이가 아니라면 이 개념들을 이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꼬마 모터를 이용해 끊임없이 검은 물을 뿜어내는 공장 모형을 보면서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시민교육’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연옥’에서 단련된 학부모라면 이런 전시를 보면서 대뜸 “이게 도대체 대학 가는 거와 뭔 상관이 있단 말이냐”며 화가 치밀어야 마땅했다. 한국 사정을 들어보면 요즘 대학입시 준비는 고등학교 때 시작해선 늦다는 게 정설이다. 중3 때 고1 과정을, 중2 때 중3 걸 떼는 건 물론, 입시지옥의 도미노는 이미 초등학생까지 중학 과정을 예습하도록 하는 ‘입시연옥’을 창조했다. 연옥에서는 지옥과 천당으로 가는 길이 함께 열려 있는 법이지만 한국의 입시연옥은 입시지옥으로만 통한다. 입시지옥을 벗어나면 새로운 연옥이 기다리고 있다. ‘학점 과외’를 받는 대학생이나, 교수가 수업시간에 사회문제에 관해 발언하면 “교수님, 수업이나 하시죠” 하는 항의가 날아드는 강의실은 ‘대학진학용 정답 맞히기 능력배양 입시교육’에서 ‘취업용 학점취득 능력배양 고등교육’으로 진화한 연옥의 변주곡이다. 교육일번지 강남 부동산 불패신화 또한 입시지옥의 불길에 비친 우리들의 일그러진 초상이다. 단테조차 몰랐던 대한민국의 연옥은 우리의 교육 이기주의가 만들어낸 새로운 멋진 신세계다.

이달 초 중학교에 진학한 슬비는 요즘 학교에서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에 대해 배우고 있다. 곧 슬비를 다시 연옥으로 끌고 돌아가는 마귀 노릇이 예정돼 있는 부모로서, 우선 초등학교부터 우리 나름의 시민교육 모델을 만들어 연옥의 사슬을 해체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이상수/베이징 특파원 lee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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