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7 17:32
수정 : 2005.09.27 17:32
유레카
임방울이 당대 최고의 ‘소리꾼’이었다면 신불출은 최고의 ‘이야기꾼’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1905년생으로, 살아 있다면 올해로 100살이 된다. 일본 식민지배 아래 청·장년기 대부분을 보내야 했던 이들은 타고난 재능으로 백성의 울분과 서민의 아픔을 달랬다. “쑥대머리 구신형용 ~”으로 시작되는 임방울의 <옥중가>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버무린 특유의 ‘임방울제’에 실려 나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던 뭇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무대에서 실수가 너무 잦아 예명을 ‘난다’(難多)에서 ‘불출’(못난이)로 바꾼 신불출은 서민 생활에 밀착한 갖가지 만담으로 웃음을 선사했다.
신불출은 구한말의 재담가 박춘재의 공연을 눈여겨 본 뒤 만담이라는 새로운 대중예술 갈래를 개척했다. 서민의 삶에 깊숙이 뿌리내린 그의 만담은 광복 직후 좌익으로 빠르게 기울었다. 46년 ‘실소사전’이라는 만담으로 ‘제국주의 미국’을 통렬하게 공격하다 ‘설화사건’을 일으킨 뒤 이듬해 월북했다. 한국전쟁 때 문화선전대 활동으로 57년에 공로배우가 된 데 이어, 61년에는 문예총 직속의 신불출만담연구소 소장에 오르는 파격적 예우를 받기에 이른다.
<한국웃음사>를 쓴 반재식씨는 만담을 “조선시대의 재담과 텔레비전 시대의 코미디를 이어주는 우리 웃음사의 연결고리”라고 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신불출의 말로는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당의 완고한 문예정책도 천부적 광대의 끼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모란봉에 올라 돌을 던지니 장에 맞더라. 두번째도 장, 세번째도 장, 간장·고추장·청국장을 빼면 무슨 장(長)이 남나?” 대범한 만담으로 통제사회를 풍자하던 그는 62년, 모든 공직을 빼앗기고 협동농장으로 추방된 뒤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소리꾼 임방울 탄생 100돌은 기념행사로 요란한데, 현대사 최초의 웃음꾼 신불출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너무 멀어졌다.
김영철 논설위원
yc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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