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9.27 17:57
수정 : 2005.09.27 17:57
|
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
세상읽기
평화는 한국 외교의 당면 목표다. 그러나 북핵 위기가 평화적으로 타결된다 해도 한반도는 강대국의 이해가 난마처럼 얽힌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완전히 ‘해탈’할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외교는 통일과 평화로 포장된 대북정책의 하위 메뉴로 전락했다. 근래의 6자회담 전략에서 드러난 외교부와 통일부의 역할 전도가 그 단적인 예다. 또 제4차 6자회담의 성사 과정에서도 정부는 북한을 외교 아닌 ‘남북대화’의 상대로만 취급해 왔다. 여타 당사국들이 보기에는 외교적 ‘더블 트랙’인 셈인데, 문제는 남북 트랙이 외교 트랙을 압도하는 현실이다. 9·19 베이징 공동성명 이후 한국 외교가 유의할 점은 이것이다.
북·미간의 공존과 관계 정상화까지 약속한 베이징 성명은 북한의 플루토늄 핵 폐기에 국한된 1994년의 북·미간 실무 합의와는 달리 엄연한 정치 합의다. 특히 30년이 넘도록 미국과 평화협정을 희망해온 북한으로서는 대미관계 정상화라는 최대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할 첫걸음이다. 반면 미국은 이번 타결을 북한에 대한 정치적 양보인 동시에 중국에 대한 외교적 패배로 본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협상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의 2001년 3월 발언이 워싱턴 강경파의 압력으로 취소된 사건이나, 2003년에 이미 이번 공동성명과 비슷한 내용의 타협안을 중재했던 중국의 시도를 미국이 일축해버린 일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미국 언론이 이번 합의를 미국 대북정책의 엄청난 변화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미국의 핵 전문가 그레이엄 앨리슨이 제시한 가상 시나리오가 대변하는 워싱턴 내부의 대북 의구심은 변화가 없다. 앨리슨은 북한을 방치하면 2006년에는 핵 실험, 2009년에는 미국 본토를 사정권에 둘 대포동 3호 미사일의 시험발사, 2011년에는 알카에다와 핵무기 판매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설사 북한이 핵 폐기에 돌입하고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이 집권한다 해도, 북한 핵 개발 우려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감시와 사찰 강도는 완화될 가능성이 없다. 또 고위 정치회담 같은 돌파구가 양국 강경파의 기선을 제압하지 않는 한, 수년이 걸릴 핵 폐기 검증 과정에서 미국에 고개 숙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할 북한의 강경파와 대북 신뢰 지수 ‘제로’인 미국 강경파가 고비마다 부딪칠 것은 뻔하다. 더구나 핵 없이도 체제 유지가 가능하다는 전략적 판단을 평양이 내렸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인 만큼 6자회담을 계속 남북관계의 틀로 풀 수만은 없다.
한반도정치는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제정치다. 한반도 문제는 미국과 중국의 세력권으로 나뉠 동북아 세력 구도의 결정 변수다. 따라서 한국 외교가 남북관계와 민족 담론에만 집착하게 되면 동아시아 세력 판도를 좌우할 한반도 문제의 외교적 해법은 역설적으로 더 멀어지고, 민족의 환상이 국제적 환멸로 변한 ‘7·4 공동성명’과 ‘6·15 공동선언’의 민망한 학습만 반복하기 쉽다.
지금 한국정치의 문제는 지역 구도가 아니다. 최근의 맥아더 동상 논란처럼 정치적 비전과 철학도 없이 오직 대미, 대북 정서만으로 피아를 갈라놓고 서로 증오하는 퇴행적 이념 구도가 문제다. 유연한 보수와 성숙한 진보가 자리잡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아직은 통일의 꿈과 현실의 국제관계를 구분해야 한다. 조기 대선 이야기가 이미 나오고 있지만, 차기 대선 정국에서 정치가 또다시 부질없는 외세 논쟁에 매몰되는 일을 막으려면 지금부터 한반도 평화 협상은 남북관계까지 포괄하는 단일 트랙의 외교로 접근해야 한다.
권용립/경성대 교수·국제정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