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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9 18:12 수정 : 2005.09.29 18:12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세상읽기

여유와 낭만의 도시로 유명한 ‘빅 이지’(Big Easy)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물바다가 되었다. 수천명 이상이 죽고 수십만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는데도 미국 정부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국제적 망신을 당했다. 영국 방송 뉴스의 뉴올리언스 난민들 화면을 보던 딸아이가 “아빠, 저기가 아프리카야?” 하고 물었다. 몸이 불편한 노인들 몇 명을 제외하고 난민들은 거의 전부가 흑인이었고, 엉망진창이 된 도시의 모습은 도저히 선진국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으니,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그런 질문을 할 만도 하다 싶었다.

뉴올리언스 수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지만, 미국은 세계 최고의 부를 자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저히 다른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빈곤이 존재하는 나라다. 이에 따라 범죄도 극심하다. 유럽에 비하면 살인율이 4배 가까이 되며(10만명당 1.7명 대 6.3명), 인구의 1%에 해당하는 200만명 이상이 감옥에 갇혀 있다. 인구 대비 수감자 비율은 무려 유럽의 8배다(유럽 10만명당 87명 대 미국 10만명 당 685명).

이런 통계를 들이대면, 미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미국이 평등은 좀 희생하더라도 부를 창출하는 데는 뛰어나기에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북유럽 나라들처럼 미국보다 성장도 잘 하면서 훨씬 평등한 나라들도 있을진대, 부를 창출하기 위해 미국만큼 고도의 불평등이 필요한가는 의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국의 소득이 세계 1위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이것은 구매력 기준이지 절대액 기준이 아니다. ‘구매력’은 달러로 환산한 나라간 물가수준의 차이 때문에 절대소득액이 진정한 생활수준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을 보정하기 위한 개념으로, 이를 기준으로 하면 미국의 생활수준은 스위스 등 절대소득이 더 높은 나라들의 생활수준보다 높게 계산이 된다. 그러면 좋은 것 아닌가?

그러나 미국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환율기준 소득 대비 구매력이 유난히 높은 것은 소득수준에 비해 저임 노동자가 유난히 많아서다. 환율은 상품의 국제교역에 의해 주로 결정되지만 구매력의 결정에는 교역이 안 되는 서비스가 포함되기 때문에, 임금이 낮아 서비스가 싼 나라의 구매력이 상대적으로 높게 된다. 이렇게 유난히 저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더구나 구매력 기준으로 보더라도 미국은 다른 선진국들보다 잘살지 못한다. 미국은 벨기에, 프랑스, 노르웨이 등에 비하면 30% 안팎, 네덜란드나 독일보다는 20% 정도 노동시간이 길어서, 구매력을 기준으로 해도 노동시간당 소득은 세계 1위가 아니다. 통계자료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미국의 노동시간당 소득은 구매력 기준으로도 세계 7~10위권에 불과하다. 대부분 유럽 나라들은 생산성이 높아서 미국보다 소득은 좀 낮더라도 훨씬 일을 덜하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항상 미국을 동경해 왔던 우리나라지만, 외환위기 이후에는 특히 미국 모델을 따라야 한다는 합의가 강력히 존재해 왔다. 그러나 이번 카트리나 사태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미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이런 합의를 형성했던 것인가 질문을 던져본다.

장하준/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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