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2 17:33
수정 : 2005.10.02 17:33
유레카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로 만든 관에 담겨, 소나무 숲 한편에 묻혔다. 태어나자마자 금줄에 소나무 가지를 걸어 액을 막고, 소나무 껍질로 송기떡을 빚어 허기를 달래며, 마을 어귀 소나무 장승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척박한 바위 산에 굳건히 뿌리내린 모습은 힘겨운 삶에 위로와 희망이 됐다.
그래서 옛사람은 소나무를 존송(尊松, 존경하는 나무)이라 했고, 한자로는 나무(木) 공작(公)이라는 뜻의 송(松)으로 썼다. 때론 존경을 넘어 신앙의 대상으로 섬겼으니,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선 신단수가 소나무였노라고 기록한다.
조선의 왕들은 안면도나 울진의 강송으로 지어진 궁궐에서 살았다. 유택의 재료 또한 소나무였으니, 생전에 최고 재질의 소나무를 골라 황장금표를 붙여 관리했다. 그것이 황장목이다. 정조는 소나무를 어찌나 사랑했는지, 서민들이 소나무를 자꾸 베어가자 가지에 엽전을 걸어놓아 소나무 대신 엽전을 가져가도록 했고, 송충이가 창궐하자 직접 송충이를 잡아 입에 넣고 씹었다고 한다.
소나무에는 내륙의 육송과 바닷가의 해송이 있다. 육송은 강송 또는 적송으로 불리며, 경북 봉화의 춘양목과 울진의 금강송, 백두산 미인송은 그 뛰어난 아름다움과 재질로 유명하다. 검은빛이 많은 해송은 곰솔로 불린다. 흑송은 일본식 이름이다. 둥치부터 쟁반처럼 둥글게 퍼지는 반송, 나무 전체가 황금빛인 금송, 껍질이 희끗희끗한 백송도 있다. 리기다는 아메리카 원산으로 일제 때 땔감용으로 들여왔다.
소나무가 산에서 대처로 내려온 지는 제법 오래됐다. 대형건물 앞뜰이나 새로 조성되는 공원은 으레 소나무를 조경수로 심는다. 그런 소나무가 최근엔 가로수로도 진출했다. 숭례문 옆 상공회의소 앞 인도에 강송과 곰솔을 심은 것이다. 숭례문의 위엄과 곰솔의 기품이 어울려 서울의 품격을 높이는 듯하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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