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4 18:09
수정 : 2005.10.04 18:09
유레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홍준은 땅끝 전남 해남까지 밀어닥친 개발과 투기 바람을 질타했다. “인간의 손때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더니 … 옛 정취도, 자연의 생태계도, 인간의 마음씀도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이 책 초판이 나온 게 1993년이었으니, 지금은 전국 어느 곳도 사람의 손때에서 자유롭지 않다. 모처럼 먼길을 떠나도, 곳곳에 들어선 가든이며 모텔이 바가지와 불친절에 겹쳐 짜증을 자아낸다.
사정이 이런데도 가을은 여행 심리를 부추긴다. 떠나고 싶고, 발길 닿는 그 어디에서 푸근한 정취와 좋은 풍광을 만나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막상 길을 떠나려 하면, 속고 실망하고 부아가 치밀었던 기억이 고개를 든다. 그래도 떠나야겠다면 ‘음식 기행’은 어떨까. 그 고장 사람의 정취가 그나마 살아 있는 게 음식이고, 가을은 음식의 계절인 까닭이다. 돈벌이에 먹거리마저 초토화한 탓에 제법 세심한 준비가 필요하지만 ‘명소 기행’에 드는 품삯 절반이면 사람 정취 가득한 음식 기행의 맛을 즐길 수 있다.
곡식뿐이 아니다. 찬바람 나는 가을은 바닷것들에 살을 보태고 기름을 올린다. 호남 곳곳의 밥상에 살아 있는 ‘채어육’(菜魚肉)이 인심좋게 올려지는 때가 지금이다. 충남 해안에는 ‘박속 낙지’의 은은하고 쫄깃한 맛이 길손을 기다린다. 전어·도다리·병어·학꽁치 같은 자연산 잡어회가 서남해안에 지천인데, 그 고소한 맛도 이때가 아니면 한결 덜하다. ‘봄 주꾸미, 가을 낙지’의 주인공 낙지도 맛과 영양이 최고다. 예부터 ‘술은 가장 좋은 음식’이라고 했다. 가을 먹거리에 지역의 명주를 그 내력과 함께 곁들이면 더할 나위 없다. 해남 진양주, 담양 추성주, 진도 홍주, 영월 무릉도원 신선주, 한산 소곡주, 전주 이강주 …. 먹거리에 전통술의 내력과 향취까지 더해지면 음식 기행은 이제 사람살이 기행과 맞닿는다.
김영철 논설위원
yc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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