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6 17:56
수정 : 2005.10.06 19:29
|
이종원 일본 릿쿄대학 교수, 국제정치
|
세상읽기
노무현 대통령의 세번째 방일이 한·일 외교의 시금석으로 떠오르고 있다. 작년부터 연 2회 한·일 양국을 오가면서 정례화하기로 했던 셔틀 정상회담의 올해 두 번째 몫이다. 지난 6월 고이즈미 총리가 서울을 방문했으니 올 하반기는 노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차례다. 원래는 격식 차리지 않는 실무회담 방식으로 한·일 관계를 강화하려는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올해 초반부터 ‘각박한 외교전쟁’이 벌어지면서 양상이 다소 달라졌다. 한국이 제기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교과서,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등의 문제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가벼운 옷차림으로 웃으며 만나기도 어색하다. 그렇다고 일년에 두 번 양국 정상이 만나서 얼굴만 붉히고 돌아서는 모습을 되풀이하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는 않다.
지난 9월22일 고이즈미 총리가 불쑥 기자단에게 “연말에 한·일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양국 정부에서 정식발표도 없고, 더욱이 한국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일정을 일방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6자회담 4차회의 종료 직후이자 노무현 대통령과 전화회담을 한 뒤에 나온 발언이라 더욱 관심을 끌었다. 한국정부와 합의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일본 쪽의 타진에 한국이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장애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일 간의 외교전을 촉발시킨 세가지 문제에서 큰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시각을 다소 바꾸어 보면 세가지 모두 적어도 악화를 방지한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가 된 후소사의 역사교과서는 4년 전의 0.04%보다는 높지만 자신들의 기대에는 크게 못미치는 0.4%의 채택률에 그쳤다. 한일 시민단체들의 노력이 낳은 성과다. 독도 문제도 시마네현 조례를 계기로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한단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가장 큰 장애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다. 고이즈미 총리는 여전히 참배를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언제든지 갈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안팎의 비판과 반대에 부딪혀 기세가 많이 꺾인 것처럼 보인다. 일본에서도 중국과의 관계 악화가 경제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는 재계를 중심으로 반대론이 많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반대가 다수를 차지한다. 9월30일에는 오사카 고등법원에서 총리의 참배를 ‘위헌’으로 인정한 판결도 나왔다.
12월 말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면 그 자체로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실질적인 억제 효과를 볼 수도 있다. 11월에 우정 개혁을 다루는 특별국회가 끝나면 개각을 거쳐 일련의 중요한 외교 일정이 계속된다. 11월 중순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부산회의와 12월 중순의 동아시아 정상회담은 일본의 동아시아 외교를 재구축하는 중요한 계기로 여겨진다. 중·일 정상회담도 예상되는 상황에서 섣불리 야스쿠니 참배를 강행하기는 어렵게 된다. 12월 말의 한·일 정상회담 직전이나 직후에 참배를 하는 것이 한·일 관계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은 일본 쪽도 잘 알고 있다.
이번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려도 역사 문제에서 큰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악화 방지도 하나의 성과로 평가되어야 한다. 아울러 북핵 문제와 6자회담의 진전을 위해 일본의 바람직한 역할을 이끌어내는 것도 과거사 문제 못지 않게 중요한 과제다. 지난 3월 이후 대일 신외교 독트린은 일본이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는 점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과거사와 독도 문제에 명확한 원칙을 견지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미래를 향한 전략적 협조를 어떻게 모색할 것인가가 새로운 단계의 대일외교의 과제다.
이종원/일본 릿쿄대 교수·국제정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