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13 18:25
수정 : 2005.10.13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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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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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문민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분으로부터 들은 회고담 한토막. 그가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뒤 전임 실장으로부터 업무 인계를 받는 과정에서 이런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대통령이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는 횟수가 잦아지면 조심해야 한다.” 참모들도 전혀 예상치 못한 깜짝카드를 내놓을 ‘위험한 징조’이니 특히 유의하라는 조언이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에는 이른바 ‘보자기론’도 있었다. 국민이 눈돌릴 틈새를 주지 않고 대통령이 보자기를 잇달아 풀어내 정국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한동안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었던 연정론이 요즘은 쑥 들어갔지만 세간의 관심은 노무현 대통령이 다음에 풀어놓을 보따리가 무엇일지에 잔뜩 쏠리고 있다. 한번 빼어든 칼을 그리 쉽게 집어넣지 않으리라는 전망에서 나오는 ‘기대 반 우려 반’ 관측이다. 노 대통령이 늦은 밤 홀로 청와대 관저에서 구상과 집필에 몰두하는 습관이 있다는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다행히 최근 들어 청와대의 정무기능이 대폭 보강됐다고 하지만 참모들도 깜짝 놀랄 메가톤급 폭탄이 터지지 않을까 하는 관측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노 대통령의 정치적 오디세이의 최종 기항지가 어딜지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연정론 쪽도 아직은 불씨가 완전히 꺼진 상태는 아닌 듯하다. 노 대통령이 독일의 대연정에 대해 “유럽의 정치 수준을 보여준 것”이라고 높게 평가한 대목도 미련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런데 만약 앙겔라 메르켈 독일 차기 총리에게 한국 대통령의 부러움을 전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이런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연정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나요. 오죽 했으면 우리 기민당이 사민당과 손을 잡겠습니까.” 여기에다 한국은 여당 의석이 절반에 가까운 144석에 이르고, 정책적 우군이 될 수 있는 민주노동당도 9석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는 오히려 한국의 대통령을 무척 부러워할 게 분명하다. “그 정도 의석이라면 산이라도 옳기겠다”고.
독일의 대연정이 출발부터 삐그덕거리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나마 기민당과 사민당이 ‘어젠다 2010’이라는 경제개혁 정책에 공조를 한 경험이 있다는 게 낙관론의 유일한 근거이지만, 앞으로 나올 정책적 ‘콘텐츠’는 취약하기 짝이 없으리라는 게 서방 언론들의 일치된 관측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독일 대연정 부러움증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콘텐츠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 멀어진 증거로도 읽힌다. 그동안 참여정부가 이뤄낸 삶의 질 개선과 사회경제적 개혁의 체감지수는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느낌인데도 벌써부터 대통령이 시들해진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그래서 나온다. 요즘 세상이 떠들썩한 강정구 교수 문제만 해도 여대야소 시절 국가보안법을 없애버렸으면 행정권과 검찰권의 충돌 따위의 잡음이 빚어질 이유가 없다.
노 대통령이 말하는 상생과 화해의 당위성에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정치문화의 눈금을 한단계 높여야 한다는 말도 백 번 옳다. 그러나 그것이 당면한 시대적 과제 해결의 회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비빔밥식 정책은 안 된다는 이야기다. 비빔밥이 별식으로 가끔 먹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음식이지만 매일 식사로는 반찬이 잘 차려진 정갈한 밥상이 제격이다. 반찬은 가짓수가 많을 필요도 없이 꼭 필요한 몇가지만 있어도 족하다. 강정구 교수 문제로 다시 폐지의 당위성이 확인된 국가보안법 한가지라도 밥상에 제대로 올렸으면 한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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