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18 18:02
수정 : 2005.10.1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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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립 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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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국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 표출을 자제해온 워싱턴 내 온건파가 변하고 있다. 대북 선제공격까지 거론해온 강경파는 이미 “미국을 버린 한국과 이제는 이별을 준비하자”고 하면서 한-미 동맹보다 남북한 관계에 더 치중해온 한국 정부를 겨냥해 왔지만, 이제는 워싱턴의 나머지 인사들까지 한국의 반미 기류에 정면 대처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0월5일에는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6자회담에서 한국 정부가 취한 대북 유화정책을 비판했다는 일본 〈산케이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그 신문의 성향과 워싱턴 내 대북 강경파의 공세를 차단하기 위한 힐의 전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리고 힐 자신이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반박 성명을 바로 내는 바람에 사태는 곧 수습되었다. 그러나 그는 외교의 베테랑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대북 경수로 제공과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아펙) 정상회담에 북한 초청 의사를 흘리면서 앞서가는 한국의 대북 외교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또 10월7일에는 미 의회의 한국통이며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전문위원인 데니스 핼핀이 헤리티지 재단의 세미나에서 한국의 일방적 대북 유화정책 때문에 금가고 있는 한-미 동맹을 ‘입관을 앞둔 주검’으로까지 비유했다. 특히 북한에 있는 동족의 인권 유린을 외면하면서 유엔 사무총장 자리를 넘보는 한국의 태도를 자가당착으로 힐난하는 그의 논법은 국제관계의 윤리에 입각한 일반론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누적된 감정의 표출로 읽힌다.
불만 표출은 개인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9월15일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소속 의원 5명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느니 차라리 미국에 넘겨달라고 요청하는 형식으로 노골적 감정을 ‘정중하게’ 전달한 바 있다. 또 헨리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위원장은 한국의 반미를 우려하는 서한을 캐런 휴스 대외 홍보담당 국무차관에게 보내는가 하면, 한국의 반미 감정과 한-미 동맹의 좌초 원인을 따질 청문회까지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의 국내정책과 대북정책이 합작해서 한-미 동맹을 위기로 몰아왔다고 믿고 있는데, 문제는 이런 확신이 강온파를 두루 아우르는 워싱턴의 중론으로 자리잡아 간다는 데에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대북정책은 반미 감정으로 인한 한-미 동맹의 약화와 더 이상 별개 문제가 될 수 없다. 한국 정부는 한-미 동맹은 ‘외교’로, 남북 관계는 ‘민족’으로 구별해서, 양자를 동시에 추진 가능한 목표로 본다. 그러나 북한과 대결하는 미국으로서는 한-미 관계와 남북한 관계 모두 엄연한 국제 관계다. ‘한-미 동맹의 발전’과 ‘조건 없는 남북 화해’라는, 양립하기 힘든 두 목표를 동시에 추구하는 한국 외교가 미국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숨바꼭질처럼 보이는 까닭도 이것이다.
한쪽을 더 중시하면 다른 쪽은 그만큼 더 경시해야 하는 양자택일 게임이 제로섬 게임이다. 워싱턴의 기류를 방치하면 향후 한-미 관계가 한국 정부의 기대와는 달리 ‘동맹’과 ‘민족’ 간의 제로섬 게임이 될 수도 있다. 한-미 동맹의 외교적 중요성을 옹호해온 워싱턴 온건파까지 강경파에 동조함으로써, 다시 불거질 북핵 문제의 더 큰 고비에서 한국은 동맹과 민족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극단적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남북 화해와 한-미 동맹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자주적 입지’를 확보하겠다는 계산이 오히려 유연한 전략 구사를 제약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 이것이 작전권 환수 협상을 비롯한 한-미 동맹의 재조정과 제5차 6자회담을 앞에 둔 한국 외교의 고민이다.
권용립/경성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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