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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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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조선일보〉가 `웰컴 투 김일성 왕국’이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빈정댔던 영화가 있다. 관객이 몰려들자 부랴부랴 호의적인 기사로 분식하느라 꽤나 애썼던 영화다. 지난주 개봉 11주 만에 〈친구〉(818만명)의 기록에 육박한 〈웰컴 투 동막골〉(793만여명)이 그것이다. 요즘에야 관객 100만명은 흔하다. 그러나 한국 영화가 관객 100만명을 넘어서는 데는 1993년 〈서편제〉를 기다려야 했다. 한국 영화사 100년 만의 기록이지만 불과 6년 만에 깨졌다. 99년 〈쉬리〉는 전국 621만명 관객을 기록하며 한국 영화사에 신천지를 열었다. 이후 한국 영화는 전혀 다른 중흥기를 구가했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가 전국 583만명(서울관객 수는 쉬리를 넘어섰다)을 기록했고, 2001년엔 〈친구〉가 818만명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 기록도 지난해 〈실미도〉(1100만명)와 〈태극기 휘날리며〉(1170명)에 가볍게 무너졌다. 잠깐, 여기서 한가지 돌아보자. 위에서 거론한 영화 가운데 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의 소재는 모두 같다. 한 영화만 주먹이 강조될 뿐 나머지는 총부리가 부각돼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공교롭게도 한국 영화의 중흥기를 연 역대 최고의 흥행작 6편 가운데 5편은 한국전쟁과 분단상황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혼란시키는 방향으로’ 풀어간다. 체제에 헌신적인 남파 공작원과 대공 수사요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쉬리), 군사적 대결의 상징인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꽃피었다가 비극으로 끝난 남북 군인들의 우정(공동경비구역), 체제가 포기한 북파공작원의 비극(실미도), 체제와 이념을 뭉개버린 아우에 대한 형의 지극한 사랑(태극기 휘날리며) 등이 그것이다. 〈웰컴 투 동막골〉에선 국방군과 인민군, 그리고 미군이 힘을 합쳐 이런 비극이 없은 세상을 꿈꾼다. 박정희나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였다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이전까지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전 혹은 분단 영화의 내용은 한결같았다. `무찌르자 공산당’이거나 `인간 백정 인민군과 불사조 국방군’ 따위였다. 극장 주변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적발하여 징계하던 박정희 정권의 문교부는 학생들을 이런 영화에 강제 동원하곤 했다. 정부의 보조와 학생 강제동원으로만 재생산이 가능했던 이들 영화는 70년대 후반 이후 점차 사라졌다. 물론 한국전쟁과 분단의 진실을 진지하게 성찰했던 영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61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고통과 절망의 심연에서 퍼올린 영상으로 시대의 목마름을 적셔줬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5·16과 함께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다. 영화인에게는 사형과 같다. 작품 속 치매 걸린 노모가 연신 내뱉는 ‘가자 가자’라는 말이 북한행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후 한반도의 비극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찰한 작품은 나오지 못했다. 그런 시도가 다시 나오기까지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되던 90년대 하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공동경비구역 …〉 등은 이런 시도의 산물이었다. 관객은 이런 영화들을 통해, 앞선 세대가 강요한 증오와 공포의 〈언더그라운드〉(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에서 벗어나 평화의 열린 공간을 모색했다. 〈조선일보〉 등은 이들을 김일성주의자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요즘은 국가 정체성 부정이란 말을 많이 쓴다. 어찌해야 현실을 직시할까. 매향리에 쏟아부은 기총탄이나 고폭탄만큼 많은 팝콘(탄) 세례를 받아야 정신을 차릴 건가.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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