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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0 17:57 수정 : 2005.10.2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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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근 24년 전, 오늘이다. 곳은 서울 서대문구치소. 습기 찬 바닥에서 복통으로 신음하는 사형수가 있었다. 이재문.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남민전) 위원장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본디 기자였다. 〈영남일보〉 〈대구일보〉를 거쳐 〈민족일보〉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기자의 길은 박정희의 5·16 쿠데타로 막혔다.

파란만장한 삶이 펼쳐진다.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석방 뒤 민주수호 국민협의회 경북지부 대변인을 맡았다. 하지만 유신은 그 길도 막았다.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이 터지자 피신했다. 결백했기에 피하지 않은 사람들은 체포됐다.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김용원 이수병 우홍선 여정남. 75년 박정희는 여덟 명을 ‘사법 살해’했다. 참극 앞에서 이재문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비장한 진술이 남아 있다. “박정희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조건에서 남민전의 결성을 준비했다.” 76년 봄, 남민전은 그렇게 결성됐다.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는 유인물 5만부를 10회에 걸쳐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했다. 유신의 폭압이 절정에 있던 시절 용기 있는 ‘언론 행위’였다. 유인물은 지하신문이었다. 그랬다. 그는 참다운 기자였다.

79년 10월 체포된 이재문은 80년 오월학살에 항의해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였다. 지병인 위유문부 협착증이 악화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문 후유증도 컸다. 81년 10월, 경찰병원 의사조차 즉시 입원과 수술을 건의했지만 권력은 살천스레 외면했다. 81년 11월22일 고통과 고독 속에 47살의 나이로 옥사했다. 꿈은 무엇이었을까. 법정에서 자신의 철학을 밝혔다. “사람들이 평등하고 행복하게 사는 세상”이다. 남민전 강령이 그렇듯 ‘폭넓은 진보적 민주정치 실현’을 꿈꾼 기자 이재문. 언제쯤일까, 세상이 그의 진실을 알아줄 날은.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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