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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3 17:48 수정 : 2005.10.23 17:48

김두식 한동대 교수·변호사

세상읽기

초면에 곧 출신 고교를 알 수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만나더라도, 그 몇 학교 출신 ‘엘리트’들(이하 ‘그들’)은 20분 안에 은근히(!) 자신의 출신 고교를 밝힐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지요. 모든 화제를 고교 동창으로 연결하는 능력은 서커스단의 묘기 수준입니다. 학계, 정계, 법조계, 언론계를 석권한 그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세대 갈등을 빚어내는 최대 분기점은 80년 광주가 아니라 74년 고교평준화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74년 이전에 고교에 입학한 그들의 세대에는 누가 31살에 시경국장을 하든, 38살에 도지사를 하든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 몇 학교에서 ‘그놈 똘똘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평생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그 학교들이 마지막(!) 졸업생을 낸 이후 그들은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한날한시에 똑똑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몽땅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우째 이런 일이! 그래서 그들 틈에 끼지 못했던 같은 세대 사람이나, 평준화 세대 애들(이하 ‘애들’)이 국회나 청와대에 들어갔다는 소문만 들으면 그들은 까닭 모를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 애들이 이른바 ‘명문’ 대학 출신이라 해도 염려는 가시지 않지요. 그 애들 나이가 이미 40을 넘어섰다 해도, 그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애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이런 이상한 기준은 그들이 속한 세대 전체를 감염시켜, 보통 사람들까지도 무의식적으로 같은 기준에 따라 남을 판단하게 만들었지요.

그들이 80년 이후 고교 졸업자들을 이해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70년대 후반 애들은 그들에게 최소한의 경의를 표할 줄 압니다. 평준화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했어도 한때나마 그 학교를 목표로 했던 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386 애들은 그 고교들 이름을 들어도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들이 애들을 인정하지 않듯, 386 애들도 그들을 전혀 경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보다 견디기 힘든 일이 없습니다. 이 장면에서 평준화 때문에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듭니다. 요즘 학생들이 실력 없는 것도, 경제가 어려운 것도, 빨갱이들이 설치는 것도 원인은 하나. 바로 평준화 때문입니다. ‘니들이 경기를 알아?’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엘리트 병은 문자 그대로 ‘질병’이므로, 그들도 희생자일 뿐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지요. 그들의 무의식을 넘어 유전자에까지 자리 잡은 서열 의식은 그들 자신과 우리 모두의 불행입니다.

늘 그랬듯이 요즘도 그들 중 여럿이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10대 중반에 온 가족이 만세를 부르는 ‘인생의 정점’에 이르러 보았던 그들에게 확률적으로 그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들의 기준을 일반인들 모두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던 시대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그들 중에 진심으로 대통령이 되고 싶은 분이 있다면 주위부터 둘러보십시오. 믿을 만한 사람들 대부분이 혹시 그들 아닌가요? 안됐지만, 이번에도 댁은 좀 어렵겠습니다. 같은 기준과 세계관의 그들만을 이끌고, 날로 늘어가는 새로운 세대 애들과 소통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장담하건대 2007년에도 선거 날까지는 당신들끼리 모여 당선을 확신하다가 저녁 6시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자기 눈을 의심하며 ‘부정선거’를 외치게 될 겁니다. 빨리 그 물에서 벗어나세요. 아니면 차라리 지금 포기하는 게 망신을 면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김두식/한동대 교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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