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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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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의법과세상
1989년이니, 옛날옛적 이야기다. 대통령 명의의 검사 임명장을 장관으로부터 전해 받기 전에 사전 교육을 받았다. “장관께 허리를 굽혀 절하지 말고 목례만 가볍게 해라.” 허리 굽혀 절하는 검사가 국민들에게 비굴하게 비칠 수 있단다. 신임검사 교육을 받을 때는 더 구체적인 교육을 받았다. “완행열차를 타지 말고, 포장마차나 시장통에서 먹지 마라.” 행여 시민들과 시비가 있어 품위를 잃을까 염려돼서다. “출퇴근 때나 식사하러 외출할 때 잘 모르는 누군가 인사하면 무시하라.” 구속 피의자의 가족을 동행한 누군가가 검사와의 친분을 과시해 불미스런 일이 생길까 걱정이다. “청사 주변의 은행이나 다방 등도 출입해선 안 된다.” 뇌물수수의 의심을 받거나 법조 주변 브로커들에게 엉뚱하게 이용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부인들에게 함부로 ‘형’이라 호칭하지 말고 부인도 마찬가지로 ‘언니’라는 호칭을 쓰지 마라.” 이미 스스로 거룩한 상류계급이니까. 검사 서로 간에도 ‘영감’, ‘대감’ 등의 호칭이 쓰였다. 조선시대 ‘대광보국숭록대부’쯤의 당상관인 듯 싶었다. 그런데, 임지에 가니 전화기, 컴퓨터, 텔레비전 등은 스스로 설치해야 했다. 참여계장의 조서 작성용 타자기는 계장 스스로 월부로 산 것이다. 타자기 먹끈도 자비로 조달해야 했다. 야간조사 때 계장, 교도관 3명, 피의자 모두의 식사와 피의자 체포를 위해 보내는 경찰관의 출장비도 검사 몫이었다. 이건 직업이 아니고 ‘귀족놀음의 취미생활’이었다. 결국 부모에게 손을 벌렸다. 어설프게 똑똑한 자식 두니 힘드시단다. 초임검사 환영회식 자리. 식사도 채 나오기 전 좌로, 우로, 무한순환방식으로 폭탄주가 춤을 췄다. 결국 한시간도 안돼 ‘임석상관’인 부장을 뺀 모두가 서열의 역순으로 장렬하게 ‘전사’해 각 자택으로 후송됐다. 식당 앞에는 행선지별로 승용차를 미리 준비한 ‘후송대책’이 마련돼 있었다. 팔을 부셔 골절수술을 받기 전날 부장이 문병와 ‘검사의 도’를 지키란다. 검사의 도? 무슨 뜻일까 고민하다 ‘엄살부리지 말라’는 말로 알아듣고 수술 뒤 통증을 꾹 참아내며 진통제 처방을 받지 않았다. 상석검사는 무섭고 자상한 형이고 부장, 차장은 어버이였으며, 무서운 할아버지인 검사장에게 결재받으러 갈 때는 허리가 후들거렸다. 하물며 총장은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하늘이었다. 부모형제에겐 불손해도 상관에겐 항상 극진했다. 또 ‘조직의 적은 나의 적’이고 ‘상관의 평온한 심기가 곧 나의 행복’이었다. 옛날에 난 그랬다. 나에겐 ‘하늘’이었던 총장에 대해 최근 어느 후배가 ‘아버지’라고 했다.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다.김용철 기획위원·변호사 kyc032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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