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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4 18:16 수정 : 2005.10.24 18:16

하승수 변호사

발언대

오는 11월2일 전북 군산시, 경북 포항시·경주시·영덕군 등 네 곳에서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유치를 둘러싼 주민투표가 실시된다. 그러나 언뜻 생각하면 민주적인 절차처럼 보이는 주민투표가 지금 그곳에선 풀뿌리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반민주적 폭거로 변질되고 있다.

주민투표는 지역의 중요한 문제를 주민들의 투표를 통해 결정하는 제도다. 관권 개입이 없어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만약 정부가 맘대로 개입할 수 있다면 주민투표는 정부정책을 합리화하는 비민주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주민투표는 무엇보다 공정한 투표 관리가 기본이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투표의 공정성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원칙들은 초등학교 반장 선거에서도 지켜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추진되는 방폐장 주민투표는 이런 원칙과 거리가 멀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이 유치 찬성 쪽에만 일방적으로 지원되어 쓰이고 있다. 공무원들이 동원되어 유치 찬성 쪽 주장만 홍보해 왔다. 중앙정부는 지방자치단체가 유치 찬성 활동에 사용한 돈에 대해서는 유치 여부에 관계없이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마디로 일반 선거에서는 있을 수 없는 금권, 관권이 동원된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돈과 관권을 동원하여 여론을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면, 주민투표는 주민참여제도가 아니라 거꾸로 풀뿌리 민주주의를 뿌리뽑는 제도일 뿐이다.

금권, 관권에 투표 관리마저 엉망이다. 부재자 투표 신고 과정에서 불법적인 방법들이 사용됐을 가능성은 39.4%에 이르는 비상식적인 신고율에서 이미 감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선관위는 20일 4개 지역에서 185장의 부재자 투표 신고서가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작성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는 문서 위조에 해당할 뿐 아니라 대리투표를 시도한 것으로, 명백한 불법행위다.

더구나 부재자 투표 신고용지만 가지고 서면조사한 것이어서, 실제 유권자들을 상대로 개별 확인을 하면 부정 사례가 훨씬 많이 드러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 독재정권 때의 ‘막걸리 선거’보다 심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상황은 정부가 방폐장 추진과 관련한 지난 사례로부터 아무런 성찰도 얻지 못한 채 또다시 밀어붙이기 식으로 사업을 추진하던 단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현행 주민투표법이 관의 개입을 차단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데다, 관은 그런 허술한 규정마저 어기고 있는 상황에서 주민투표가 일반 선거보다 엄격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얼핏 부질없어 보인다. 하지만 주민투표는 주민들에 의해 발의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정부의 불법과 전횡을 막을 길도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 주민들의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고자 하는 것이 주민투표제인데, 사실상 관이 주민투표의 실시 여부를 결정하고 투표 과정에 개입하는 것까지 허용하고 있으니 관권, 금권이 판을 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주민투표를 강행한다면 논란만 증폭시킬 뿐, 민주적인 의견수렴 기능은 결코 하지 못할 것이다. 부정선거 결과가 인정받을 수 없는 것처럼, 부정하고 불공정하게 치러지는 주민투표는 인정받을 수 없다.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민투표가 공정하게 치러질 수 없다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주민투표 일정을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에 드러난 사업 추진 과정의 문제점을 조사하고 주민투표제의 허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부터 기울이는 것이 순리이다.

하승수/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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