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24 18:22
수정 : 2005.10.24 18:22
유레카
정부가 부산·인천 등의 경제특구와 제주 같은 국제자유도시 안의 학교에서 영어로 수학·과학 등의 교과를 가르치는 ‘영어 몰입교육’ 방침을 내놨다. 이 계획은 120년 전 이 땅에 근대 교육이 첫발을 내딛던 때의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손인수 교수가 쓴 〈한국개화교육연구〉 등을 보면, 가장 먼저 생긴 근대교육 기관은 1883년 함경남도 덕원 주민들이 세운 원산학교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인천과 함께 개항한 원산항으로 일본 상인들이 몰려드는 걸 보면서 위기감을 느낀 민중들이 나라를 지키자고 만든 학교다. 똑똑한 아이들 250명을 뽑아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으로 나눠 가르쳤는데, 공통과목은 산수·격치(물리)·농업·양잠·채광이었다. 그리고 차차 외국어·법률·지리·만국공법(국제법) 등으로 과목을 늘렸다.
같은 해 정부도 동문학이라는 근대 교육기관을 세웠다. 통역관 양성소 격인 이 학교는 중국인, 영국인 교사들이 영어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3년 뒤 고종의 지시로 육영공원이 세워졌는데, 이 또한 조지 윌리엄 길모어 등 3명의 미국인을 초빙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 상황을 길모어는 이렇게 썼다. “학생은 귀족 가정의 자제이었고 국왕이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우리 반에는 35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아무도 영어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알파벳부터 시작하여야 했다. 통역 세 사람이 있어 우리 선생 3인에게 한 사람씩 배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영어 공부의 신기함이 사라진 학생들이 공부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됐고 관리들의 비리까지 겹치면서 교사들이 떠나 동문학은 결국 1894년 문을 닫았다. 원산학교가 갑오개혁(갑오경장) 무렵 소학교와 중학교로 분리되고, 소학교는 해방 당시까지 유지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1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민중과 정부가 외세에 대처하는 방식은 변함이 없는지 모른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