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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후이 칭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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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창
청명절을 이틀 앞둔 지난 4월3일, 나는 쿤밍과 리장을 거쳐 2시간 더 차를 타고 달려야 하는 진사강변의 처저우란 곳에 갔다. 그 오지에 간 건 서른둘 나이에 세상을 뜬 샤오량중이란 작가가 살던 집과 묻힌 곳에 가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묘비엔 ‘진사강의 아들’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지난해 이후 나는 윈난에 세 번 갔다. 그 사이 뜻을 함께 하던 두 명의 젊은이가 운명을 달리했다. 한 사람은 지난 번 이 칼럼(7월14일자)에서 쓴 시인 마화이고 또 한 사람이 샤오량중이다. 샤오량중은 장래가 촉망되는 인류학자이자 작가였다. 그는 나로 하여금 지식인의 학술 연구와 사회참여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를 안 건 내가 몸담고 있는 <독서>란 잡지를 통해서였다. 2002년 초, 그는 우리 잡지에 ‘만수이만의 은유’란 글을 투고해 왔다. 쓰촨성 몐닝현 남부의 만수이만에는 중국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이족이 살고 있다. 그의 글은 땅과 하나되어 소박하게 살아온 이족 사람들의 풍습을 생동감 있게 기록했다. 그는 결론에서 “이족 문화를 다른 문화와 구별되도록 한 건 일종의 ‘은유’라 할 수 있는 그들의 문화적 특징이 환경 속에서 어떤 점은 축소되고 어떤 점은 확대된 결과”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의 통찰에 감탄했고, 며칠 뒤 직접 만났다. 그는 주로 중국 서남부 지역 소수민족의 역사와 운명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샤오량중은 타고난 학자였다. 지난해 봄 그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지리역사연구중심과 티베트학연구중심 등 두 가지 연구기관을 두고 어디로 갈 것인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후탸오샤댐 건설 반대 운동이 전개됐다. 윈난성에 이 댐이 건설되면 이 지역에 사는 수많은 소수민족의 문화와 삶은 물 속에 잠길 운명이었다. 그는 연구기관에 자리잡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게 분명함에도 이 반대운동에 기꺼이 동참했다. 지난해 10월27~29일 베이징에서 ‘수력발전과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한 유엔 국제 연구토론회’에서도 샤오량중은 후탸오샤댐 건설의 문제점을 성토했다. 그는 단순히 ‘논문’을 발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사강변 처저우 마을 사람들을 토론회장으로 불러와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했다. 지난해 11월 그는 사회과학원에 자리 잡는 데 성공했다. 그는 학술 연구를 매우 사랑했지만 사회 참여에도 똑같은 관심을 돌렸다. 그는 서재의 연구와 사회 참여를 대립시켜 보는 데 찬성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론과 실천 사이엔 늘 연동관계가 있다. 지난 세기를 통틀어 실천은 단지 행동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론의 문제이기도 했다. 학술연구자는 왜 실천이 이론의 기초를 구성하는지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하고, 사회운동가는 실천이 왜 반드시 이론적 사고와 결합해야 하는지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샤오량중은 지난 1월5일 새벽 고향 집에서 돌연사했다. 하루 전까지 윈난성에서 열린 사회운동단체의 회의에 참석한 뒤 돌아온 그는 그날 밤 늦게까지 회의에서 발표할 문장을 썼다. 치열하게 학술 연구에 빠져들고 치열하게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었던 그의 죽음은 며칠 동안 나를 잠못들게 했다. 지난 4월 그가 살던 옛집을 찾으러 밤길을 도와 마을에서 나가려 했으나, 사방에서 시작된 공사는 도로를 모두 막았다. 나는 할 수 없이 진사강변 샤오의 집으로 되돌아와 그의 옛집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사방에서 샤오의 미소를 느꼈다. 나는 그 미소가 진샤강을 지켜달라는 샤오의 요구라고 믿는다.왕후이/칭화대 교수·중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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