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30 17:28
수정 : 2005.10.30 17:28
유레카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이 지나면 들은 급속히 황량해진다. 김장용 배추와 무만 들판을 지킨다. 이렇듯 사위가 스산해질 때 창연히 빛을 발하는 게 있으니, ‘들국화’다. 원예종인 대국·중국·소국의 우아함에는 견주기 힘들지만, 그윽한 향기와 청초한 자태는 사람이 이를 경지를 넘어섰다. 옛사람이 ‘늦어 피니 군자의 덕이요/ 상풍(霜風)에 아니 지니 열사의 곧음(節)이로다’라고 칭송한 것도 들국화였으리라.
그러나 들국화는 식물도감에 나오지 않는다. 저 홀로 꽃 피우는 야생의 국화를 통칭하는 말이다. 대개 손톱만한 노란 꽃을 바글바글 피워대는 가을 꽃을 보고 그리 부르지만, 그것은 감국이거나 산국이다. 뭐라 이름하든 기세등등하던 가시덩굴이나 잡초가 된서리에 기가 꺾여 폭삭 주저앉을 때 불쑥 솟아올라 꽃 피우는 ‘들국화’는 그저 경이롭다. 꽃은 작지만 그 향기는 10리 밖 벌 나비를 불러들인다. 피돌이, 혈압 내림에 좋고, 숙면에 들게 하는 덕도 갖춰 서민들 아픔을 달래왔다.
감국·산국 말고도 ‘들국화’에는 여럿이 더 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이 머리에 꽂고 다니던 꽃은 구절초다. ‘순수’란 꽃말처럼, 천진한 누이 같다. 형제로는 산구절초·바위구절초·키큰산국 따위가 있다. 요즘이 한참 필 때다. 쑥부쟁이 연보라색 꽃은 파란 가을하늘과 아름답게 어울린다. 형제로는 부지깽이나물이라 불리는 섬쑥부쟁이와 갯쑥부쟁이 등 10여종이 있다. 벌개미취는 쑥부쟁이의 사촌뻘. 대개 ‘이름 모를 꽃’으로 치부하는 비짜루국화·구름국화·개미취·해국·참취 등은 개미취 형제들이다.
서릿발 속에서 비로소 향기를 퍼뜨리는 들국화는 노년의 기품과 관용을 상징하기도 한다. 노년은 스러지는 게 아니라 깊어지는 것임을 들국화는 넌지시 일러준다. 가벼이 핏발 세우는 주변의 많은 노년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꽃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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