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31 18:13
수정 : 2005.10.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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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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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신칼럼
검찰은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에서 조직적인 불법 도청행위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은 이미 구속 기소되었고 전직 국정원장 두 명은 김 차장의 공소장에 ‘공모범’으로 적시된 상태다. 국정원은 정치인 등 주요 인사에 대한 휴대전화 도청을 무차별적으로 자행했다고 알려진다. 김 전 차장은 ‘국가통치권 보존의 차원에서 관행적으로 도청했을 뿐’이라고 진술하지만 그 중에는 특정인의 금전 관계, 여자관계, 자기과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검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도청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단다. 국정원이 도청으로 수집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합법적인 방법으로 수집한 정보와 뒤섞어서 종합적으로 보고하기 때문에 보고받는 사람은 도청자료가 들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정치적 파장을 고려한 검찰의 전략적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정원의 한 직원은 “디제이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안기부, 중앙정보부가 수행한 업무의 70% 이상은 ‘반김대중’과 관련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으로 국정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부당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여러분도 부당한 지시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품성과 삶의 이력을 감안할 때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의학에서 말하는 ‘이중구속(double bind) 현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조금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다. ‘이중구속’이란 상대방에게 서로 상이한 언어적 의사소통과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동시에 부과되는 상황, 즉 서로 모순된 말과 행동이 동시에 전달되는 상황을 말한다. 예를 들면 엄마가 평소에 ‘말’로는 아이에게 학교 성적에 연연하지 말라면서도 결과가 좋지 않은 성적표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는 ‘행동’을 보이는 경우다. ‘이중구속’의 메시지를 받은 아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란을 느낀다. 심하면 병적인 상태로 연결되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는 그것이 자신으로 인해 생긴 문제라고는 상상조차 못한다. 평소 자신은 성적 따위가 제일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말해왔던 사람이라는 확신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욕망이 아이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권력자 주변에서는 이런 ‘이중구속’ 현상이 적지 않게 발생한다. 리더의 심중을 읽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들에게 이중구속의 모호한 메시지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김은성 전 차장은 ‘불법 도·감청에 의존하지 말고 발로 뛰는 정보 수집을 독려했다’며 직원들에게 도청을 지시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 과정에서 이중구속의 메시지가 직원들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걔 때문에 골치아파’라는 보스의 짜증 섞인 혼잣말에 행동대원은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보스는 ‘죽이라고 한 적 없다’고 항변하겠지만 이중구속의 메시지에 이미 포함된 말이다. 리더가 이중구속의 메시지를 명확하게 차단해 주지 않으면 주변인들은 인정욕과 질책의 불안감에 휩싸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권력자는 늘 자신의 말에 깃들 수 있는 이중구속 메시지를 경계하고 통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불법으로 통신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라는 대국민 광고까지 내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김대중 정권에서 벌어진,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불법 도청사건을 접하면서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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