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01 17:56
수정 : 2005.11.0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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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수 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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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망대
필자가 살고 있는 영국 케임브리지의 한 대형창고에서는 매월 마지막 토요일 ‘북 세일’ 행사가 열린다. 지난 29일 그곳을 찾은 건 이곳 중·고교생들이 경제 과목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전경련 등이 초·중·고 경제 관련 교과서들이 좌편향돼 있다며 수정을 요구한 게 계기였다. 교과서들을 살펴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이번에 교과서를 검토한 한국 경제학 교수들이 영국 것들을 검토한다면 ‘기절초풍’하겠다는 거였다.
애덤 스미스, 케인스, 마르크스의 경제사상은 물론이고, 아시아, 유럽, 영미식 경제체제의 장단점을 자세히 소개하는가 하면, 제3세계 노동자에 대한 국제자본의 착취 문제를 다루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경제 현실의 맥락에서 각각의 장점과 문제점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유도하는 기술방식이었다. 한 교과서는 한국 경제를 두 쪽 분량으로 소개했는데, ‘정부 역할 중시냐, 시장 기능 신뢰냐’의 문제를 다룬 단원에서도 한국 등을 사례로 들며 “그들은 이제 국가개입의 위험과 족쇄 풀린 시장자본주의의 결점을 함께 인식하고 있다”고 적었다(Economics from a Global Perspective: 539쪽). ‘시장의 나라’ 영국이 불온한 교육을 하고 있는 걸까?
경제단체들이 “반시장-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교과서를 개편해야 한다”고 요구해온 것은 외환위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래 결성된 ‘교과서 포럼’ 등 뉴라이트 계열 경제학자들이 나서면서 큰 결실을 맺게 됐다. 재계의 ‘교과서 검열’이 김석중 전경련 상무 말대로 “100% 성과”를 거둔 것은 재경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세미나를 주관한데다 교육부가 지적사항을 대거 수용하겠다고 나선 덕분이다. 재경부도 그렇지만 시장주의자인 경제관료를 ‘교육도 산업’이라며 교육부 장관 자리에 앉힌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이 지적한 것 가운데 사실관계가 틀린 교과서 내용은 고치는 게 옳다. 그러나 상당수 지적은 사리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한국 경제의 올바른 인식을 위해 빼서는 안될 것들이다. 가령 ‘재벌이 문어발식으로 기업을 늘리고 은행 돈을 빌려 필요없는 투자를 많이 함으로써 경제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했다”는 대목은 외환위기를 통해 얻은 뼈아픈 교훈이 아니던가? 세미나에서 한국개발원 쪽은 “이데올로기적 접근 내용은 교과서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했는데, 시장을 지고지선으로 받드는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뭔가? 보수언론은 한술 더 떴다. 사설에서 “교육부가 검정단계에서 경제단체 등에 자문할 것”(파이낸셜 뉴스)을 제안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아도 삼성 때리기 등의 반기업 정서가 조장되는 상황에서 교과서마저 이를 부추기고 있다”(매일경제)고 개탄했다.
사실 ‘반기업 정서’는 실체가 없는 말이다. 삼성전자와 두산베어스를 누가 미워하랴? ‘반재벌 정서’, 더 좁혀 말하면 ‘반재벌총수 정서’라고 표현해야 옳다. 이를 부추긴 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일부 재벌 총수들이고 나머지는 덤터기를 썼다. 올여름부터 그런 정서를 극대화한 두 재벌 총수가 누구인지는 누구나 안다. 교과서 공략에 나선 전경련은 삼성 출신이 주도하고, 교과서에 대해 ‘쓴소리’랍시고 많이 한 사람은 대한상의 회장이다. 교과서마저 일부 집단에 장악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운다면 그 이념은 영구적으로 교조화하게 된다. 교과서는 우리 경제현실을 외면한 채 신자유주의에 기운 일부 교수들이 아니라 양식 있는 다수 교사들 손에 남겨놓는 게 옳다.
이봉수/런던대 박사과정·경제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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