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02 19:49
수정 : 2005.11.0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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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서강대 강사·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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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국사회
내가 볼 땐 별로 도전적이지 않은데 상대방은 불온하다고 히스테리를 부리면, 대화의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 최근의 ‘강정구 정국’도 그런 현상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1등 신문’은 영화 〈웰컴투 동막골〉이 북한을 미화하는 ‘웰컴투 김일성’이라고 주장한다. 이 영화는 ‘상업적’이면서도 남북 화해를 간증하며, 공포와 지배는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의미의 합의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유할 만한 텍스트다. 동막골 사람들은 뱀은 무서워할지언정 총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권력은 ‘무지’를 통과하지 못한다. 또한, 이 작품은 “약자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지성이다”라는 마틴 루터 킹과 “내가 주장하는 것은 폭력의 효율성이 아니라 폭력을 통한 식민지 민중인 ‘나’의 등장이다”라고 외친 프란츠 파농과 연대한다. 나는 이 영화의 ‘민족주의’를 ‘지지’한다.
그러나, 〈…동막골〉은 ‘웰컴투 김일성’이라고 흥분하는 이들이 걱정(실은 피해망상)할 만큼 ‘급진’적이지 않다. 영화는 80년대 백무산의 ‘빼어난’ 시, 〈기차를 기다리며〉(“새마을호… 무궁화호도 빨리 온다/통일호는… 비둘기호는 더 늦게 온다… 통일쯤이야 연착을 하든지 말든지/평화쯤이야 오든지 말든지”)에서 크게 나아가지 않는다. 평화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는, 평화를 비둘기에 비유하는 것이다. 평화가 우선적 가치가 되지 못하고 폭력이 숭배되는 현실은, 가부장제와 관련이 있다. 전쟁과 평화의 이분법은 성별화된 이미지로 작동하여 위계화된다. 전쟁이 능동적, 영웅적, 투쟁적, 남성적이라면 평화는 수동적, 소극적, 정적, 여성적인 것이 연상된다. 비둘기는 순종, 고요, 의견 없음, 심지어 지루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평화는 흔히 생각하듯 갈등과 고통 없는 상태가 아니다. 만일, 평화를 ‘도 닦는’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평화는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것이다. 평화는 폭력 대신 대화, 말의 정치를 선택하는 것인데, 소통은 언제나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모든 대화는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변화를 위한 것이며, 때문에 역설적으로 ‘격렬한(폭력적인)’ 것이다. 평화는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혼란과 모순을 ‘정리’(=변화의 중단)하지 않고 견디는 힘이며, 계속적이고 치열한 저항을 뜻한다. 여성학자 김은실의 지적대로, 이 영화의 보수성은 평화를 시간적 타자로 만든다는 데 있다. 평화는 전쟁 이전의 동막골이라는 ‘옛날 옛적 그곳에’ 현실을 초월하여 ‘선재(先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생성’해야 하는 것이다.
‘평화=비둘기’로 보는 영화의 남성 시선은 마지막 전투 장면에서 절정에 달해, 전쟁 혐오와 노동의 소중함을 표현한 전반부의 긍정적 정치학을 훼손하고 있다. 동지가 적에게 죽자, 놀기 좋아하고 늘 뒤꽁무니를 빼던 남한 청년은 ‘미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총을 난사하며 ‘장렬히 전사’한다. 적의 폭력으로 인해 순박한 남자가 ‘진정한 남자’로 성장한다는, 폭력의 불가피성을 찬양하고 낭만화하는 전형이다. 오히려, 적에 대한 분노와 그로 인한 ‘폭력’보다는 ‘나약하고 비겁하게’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는 남성성 위반이다)이, 평화를 위한 정치적 실천에 더 가깝지 않을까.
남성다움은 평화를 실현하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성찰해야 할 문화이다. 그런 점에서, ‘웰컴투 김일성’과 ‘웰컴투 동막골’의 거리는 멀지 않다.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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