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02 19:58
수정 : 2005.11.02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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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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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칼럼
공연장을 찾는 문화생활을 포기하다시피 살다가 모처럼 연극을 봤다. 본지에 실린 연극 관련 기사(10월12일치 19면)에 눈길이 쏠렸기 때문이다. 일본의 극단 세이넨게키조(청년극장)가 거의 40일 동안 전국 각지를 돌며 소설 〈빙점〉 등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의 〈총구〉를 각색해 공연한다는 내용이었다.
1999년에 세상을 떠난 미우라가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쓴 이 작품은 일제 말 홋카이도의 탄광촌에 있는 소학교에 부임한 새내기 교사의 꿈이 군국주의 시대의 광기에 의해 농락당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내가 공연을 본 서강대학교 홀은 무대의 양쪽에 전광판을 두어 일본말 대사를 우리말로 옮겨 보여주었다. 배우들의 어조가 빨라지면 기술적 문제로 다 옮기지는 못했지만, 관객들이 이해를 하는 데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공연이 끝난 후 출연배우들이 나와 인사를 할 때 주인공 기타모리 류타 역을 맡은 후나쓰 모토이는 우리말로 “이 작품이 한국과 일본을 잇는 우정의 다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외쳤다.
올해는 ‘한-일 우정의 해’지만 축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독도 문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도발, 극우 정치인들의 망언 등 악재들이 꼬리를 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우정의 해란 명목으로 수많은 문화행사, 이벤트가 치러졌지만, 대부분 큰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잊혀졌다. 하지만 적어도 총구 상연에 관여한 사람들은 한국인들을 상대로 새로운 미래로 향해 나아가자고 자신있게 말을 건넬 자격이 있을 것 같다.
지난달 13일 당진에서 시작된 총구 공연은 오늘은 양산에서 벌어진다. 앞으로도 순천 광주 목포 진주 공연이 이어지며, 오는 18일 제주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순수 일본인 극단이 공주 창원 함안 등 14개 도시를 도는 강행군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문화적 ‘두메’라 할 수 있는 지방도시에서 한국의 문화인, 관객들을 직접 만나 교감하고 싶어 이런 기획을 했다는 것이 극단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홍보가 제대도 되지 않은 탓에 어색한 국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공연에서 관객들은 열띤 기립박수로 극단원들의 노고에 보답했다고 한다.
1964년에 창립돼 사회성 짙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이 극단의 단원들이 한국 공연에 거는 남다른 기대와 열의는 극단 홈페이지(seinengekijo.co.jp)에서도 확인된다. 단원들은 각 지역의 공연 상황을 게시판 등에 띄우며 중계하고, 극단 후원자들이나 관객들은 격려하며 소감을 남기곤 한다. 40대의 한 일본인 남성은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국경은 없다”며 “한국에서 보는 총구는 각별하다”고 표현했다. 서울 공연장에서는 일본인 관객들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한-일 사이의 진정한 우호를 바라며 실천하는 이들이 있기에, 과거청산을 둘러싼 알력과 갈등이 그치지 않아도 두 나라의 관계를 어둡게 단정할 필요는 없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일본에 부는 한류의 영향이 간단찮다고 평가하고, 한국의 감독, 연출가, 드라마 피디들이 두 나라의 기구한 현대사가 녹아든 문화 작품을 호소력 있게 만들어낸다면 역사적 화해에 큰 구실을 할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세이넨게키조의 한국 순회 공연은 그런 점에서 이땅의 문화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5t 트럭 두 대분의 장비를 싣고 유랑생활을 계속하는 극단 관계자들에게 갈채를 보내며 공연 일정이 성황리에 마무리되기를 빈다.
김효순 편집인
hyos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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