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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3 18:23 수정 : 2005.11.03 18:23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세상읽기

“일본은 동아시아를 통합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일찍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 수도 훨씬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6·25가 통일전쟁이고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전쟁이 한 달 안에 종결되었을 것이라는 강정구 교수의 논리를 일제의 침략에 적용한 주장이다. 형식논리상으로는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겠다고 했고, 미국이 대일 금수조처를 취하지 않고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일제는 비교적 수월하게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침략을 당한 쪽에서 저항을 하지 않으면 전쟁은 일찍 끝날 것이고 희생자도 별로 없을 것이다’라는, 당연하지만 허탈한 명제도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형식논리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왜 그런 것일까?

우선, 의도적이든 아니든 가치판단은 유보한 채 두루뭉술하게 사건의 외형만을 보고 그 사건의 성격을 규정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후삼국의 분열을 극복한 왕건의 통일전쟁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외형적으로는 같은 ‘통일전쟁’이라도 당나라를 끌어들여 반쪽짜리 ‘통일’을 이룬 김춘추와 김유신의 선택이 훌륭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통상 긍정적인 어감이 있는 ‘통일전쟁’이라는 표현을, 외형상으로는 비슷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다른 전쟁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는 가정을 부분적으로만 하고 있는 것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강 교수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면’이라고 가정한 후 ‘전쟁은 한 달 안에 끝났을 것이고, 사상자 수도 크게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강 교수는 전쟁 이후 한반도에 어떤 체제가 들어섰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다가, 파문이 확산된 뒤에야 비로소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 바 있다. 전쟁 이후 어떤 사태가 전개될 것으로 가정하는가에 따라 전쟁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는데, 강 교수는 전쟁 이후 체제에 대한 논의를 과감하게 생략했던 것이다. 오히려 전쟁의 조기 종식 그 자체가 지고지선의 가치인 것처럼 간주하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강 교수는 한국 현대사를 학술적으로 접근한다고 주장했지만, 학술적이라고 하기에는 논리전개 방식에 무리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의 주장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강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차원을 넘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강 교수를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고 표현의 자유가 민주공화국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들의 행동이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다.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면 표현의 자유에는 ‘허접한’ 주장을 할 자유도 포함된다.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반박을 하면 되고, 그 정도 가치도 안 된다면 무시하면 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로 만들어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물론 10·26 재보궐 선거가 끝난 뒤 강 교수에 대한 사법처리를 요구하는 소리가 잦아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과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수호해야 한다고 외치는 이들의 노력에 얼마나 진정성이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임원혁/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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