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11.03 18:26 수정 : 2005.11.03 18:26

유레카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작가는 〈백치〉에서 토로한다. “선고문이 낭독되면 이젠 죽음이 기정사실화합니다. 바로 여기에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가혹한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

상상이 아니었다. 절절한 체험이다. 38살 때다.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논의하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체포됐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대에 올랐다. 집행하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특사가 내렸다.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황제 아닌 대통령이었다. 박정희가 ‘통치’하던 대한민국의 36년 전 오늘은 달랐다. 11월4일. 한 경제학자가 서울 서대문 구치소 사형대에 앉았다. 차르의 톨레랑스조차 박정희는 없었다. 마흔넷의 준수한 경제학자는 이슬로 사라졌다.

권재혁. 1925년 영남에서 태어났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조지타운대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이수했다. 조국에서 4월혁명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했다. 귀국했다. 대학 강단에 섰다. 경제학을 가르치고 실천했다. 〈한국노동자신문〉의 기자로, 경제문제연구회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움직였다. 출중한 경제학자를 ‘남조선 해방전략당’의 당수로 발표했다. 같은 사건으로 복역한 통일운동가 고 김병권은 증언했다. “정보부가 당 이름을 지었다.” 권재혁이 쓴 ‘남조선 해방의 전략과 전술’이라는 논문에서 따 왔단다.

남조선 해방전략당은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과 함께 박정희 독재시기의 ‘비합법 정당’이다. 아니 정당 추진세력이었다. 박정희는 세 당의 ‘지도부’에게 모두 사형으로 답했다.

세 당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굽히지 않았다. 힘 모아 세운 게 바로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이다. 지도자 이재문과 신향식, 그리고 앞서 사형된 권재혁, ‘모독’당한 세 영혼은 지금 어디 있을까. 편히 잠들어 있을까.

손석춘 논설위원 songil@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