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03 18:27
수정 : 2005.11.03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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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문화생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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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발
‘스크린쿼터’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지긋지긋하다. 1998년부터 7~8년 동안 스크린쿼터 기사를 쓰면서 똑같이 되풀이되는 찬성과 반대 논리를 중계했으니 지치지 않겠는가.
지난달 21일부터 달라졌다. 파리에서 문화 다양성 협약이 유네스코 회원국 투표 결과 148 대 2의 압도적 표차로 채택됐다는 소식이 날아온 날이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좋았다. 반대한 두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문화상품에 한해서 자국의 보호조처를 인정하자’는 취지의 이 협약은 모든 문화·예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이지만 경제적 이해관계가 가장 큰 건 아무래도 영화다. 세계 영화시장의 85%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이, 그 나머지까지 먹으려다가 ‘왕따’를 당한 것이다.
한국은 프랑스, 캐나다와 함께 이 협약의 채택을 이끌어낸 3대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한국 정부가 아니라 한국의 영화인과 시민단체들이다. 이들은 협약과 관련한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열기도 했고, 대회마다 불려가 한국 영화 발전에 스크린쿼터가 기여한 공로를 설명했다. 스크린쿼터는 문화 다양성 협약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실제 사례로 세계에 알려졌고, 몇몇 대회에선 한국어가 공식어로 채택되기까지 했다. 그 지긋지긋하던 스크린쿼터 싸움이 이런 결과를 낳았구나 하는 생각에, 스크린쿼터 하면 지긋지긋해하던 마음이 싹 가셨다. 그리고….
숨 고를 틈도 없이 예상했던 일이, 예상보다 훨씬 큰 무게로 닥쳐오고 있다. 엊그제 로버트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스크린쿼터 축소를 전제조건으로 한국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시작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 며칠 전에 〈엘에이타임스〉는 ‘미국과 한국, 영화전쟁 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표현을 빌리면 포트먼의 말은 ‘선전포고’인 셈이다. 당연하다. 미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간 협상을 통해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확장하려던 미국은 유럽의 반대로 여의치 않자 얼마 전부터 자유무역협정 같은 양자간 협정을 통해 다른 나라들을 ‘각개 격파’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나라들이 스크린쿼터 같은 자국 문화상품 보호조처를 취하기 시작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빨리 주동자를 잡아야 한다. 주동자가 누군가. 한국이다.
포트먼은 ‘자유무역협정’을 97년 이후 한국의 경제개혁에 대한 ‘보상’이라고 표현했다. 자유무역협정은 한-미 투자협정(BIT)보다 훨씬 폭이 넓고 깊다. 경제협정이기보다 경제통합에 가깝다고까지 한다. 투자협정을 추진했던 한국 관료들이야말로 영화인들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영화인들이 주동을 서서 이런 ‘보상’책이 왔으니까. 그러나 미국과 ‘에프티에이’를 맺으면 5년 뒤 대미 무역 흑자가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이해영 한신대 교수, ‘신자유주의와 FTA’) 앞으로 ‘자유무역협정’과 스크린쿼터를 두고 득실 논란이 벌어지겠지만 ‘투자협정’ 때와 마찬가지로 상반되는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기 쉽다. 그런데 이런 명확하지도 않은 실익 계산 앞에서 원칙은 소용없기만 한 걸까.
스크린쿼터 회의론자들은 스크린쿼터가 없어도 한국 영화 흥행에 지장이 없는데 왜 두려 하느냐고 묻는다. 반대로 나는 장사에 지장이 없음에도 스크린쿼터를 지키려고 싸워온 영화인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은 원칙을 세웠고, 그 원칙에 세계 148개국이 지지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 전세계의 지식인, 예술인들이 ‘한-미 영화전쟁’을 지켜보고 있을 거다. 그 대다수가 한국을 성원하고 있을 거다.
임범 문화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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